배우 손현주.

배우 손현주. ⓒ 호호호비치


관록의 배우라도 출연작을 관객 앞에 선보일 때는 늘 떨리는 법이다. 영화 <악의 연대기>로 또 다른 스릴러에 도전한 손현주는 '두렵다'는 말로 감정을 표현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손현주를 만났다.

스릴러 장르로 구분한다지만 영화 <악의 연대기>는 인간의 심리 변화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본청 승진을 앞두고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된 경찰 최창식 반장(손현주 분)이 미묘하게 변하는 모습이 영화의 관건이다. 그에 따라서 다른 캐릭터들의 진정성 역시 담보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궁지에 넣은 미지의 인물을 찾고자 고군분투 하는 과정에서 과격한 액션을 여럿 소화했지만, 상당 분량이 빠졌다. "나도 아까운 부분이 있는데 감독님은 오죽했을까. 찍어놓고 통편집된 연기자들도 있다"란다. 손현주 다운 화법이다. 

몸과 마음 아팠던 촬영 현장...."죽기 살기로 할 수밖에" 

촬영 직전과 촬영 당시 그는 아팠다. 단순히 현장에서 과격한 액션연기로 얻은 각종 타박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발견된 갑상선암으로 지난해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로 인해 <악의 연대기> 촬영이 1개월가량 지연 됐다. 그의 출연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마동석, 박서준, 최다니엘 등을 비롯해 스태프들이 그를 기다려줬다. 제작보고회 현장에서도, 언론 시사 직후에도 거듭 그는 상반신을 90도로 숙이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 나 때문에 촬영 일정이 바뀐 거잖나. 현장에서는 내가 아팠다는 사실을 아니까 다들 놀아주지 않더라. 촬영 중간 중간에 좀 쉬라며 자기들끼리 술 마시고, 날 안 부르던데 '선배님 건강 좀 어때요?'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을 수 없었다(웃음). 방에서 혼자 향초 켜놓고 대본 보는 기분을 그들이 알까. 유배된 기분이었다. 내 몸 아파도 촬영에선 또 적당히 할 수는 없지. 죽기 살기로 뛰었다.

모든 배우들이 자기 역할을 잘했기에 <악의 연대기>가 나온 거다. 주연과 조연이 어딨나. 우린 작품을 위한 한 팀이다. 나 역시 조연 때 내 분량이 많이 잘리곤 했다. 촬영한 다음날 설정이 바뀌기도 한다. 가슴 아프고 슬프지만 배우로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 역시 지금도 조연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내 역할을 해내려 하는 거다."

 영화 <악의 연대기>의 한 장면.

영화 <악의 연대기>의 한 장면. ⓒ 비에이엔터테인먼트


장르적 성격을 감안하면 그의 전작 <숨바꼭질>과 드라마 <추적자> 등과 비교될 여지가 크다. 손현주는 "현실성이 차이점"이라 강조했다. <추적자>는 말도 안 되는 권력과 싸워 나간다. 물론 죽은 딸과 관련한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는 아빠라는 설정에서 강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지만, 현실 세계와 가까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에 비해 <악의 연대기>는 가족을 위해 팀을 위해 조금씩 타협해 간 한 남자에 주목함으로써 악함을 담보했다. 영화를 통해 진짜 악인은 어쩌면 평범한 소시민일지 모른다는 질문을 던진 거다. 

"다들 세월의 때가 묻고 세상의 때가 묻으며 타락한다. 그걸 타락이라고 못 느끼는 게 잘못이다. 최창식 역시 뒤로 받은 수백만 원 대의 상품권을 팀원과 나눠 쓰고, 후배를 챙긴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을 참 잘하는 인물인데 그게 타협인 거지. 그런 의미에서 최창식은 (영화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에 대한) 가해자다. 초임 형사 때 가졌던 순수한 정의감을 지키고 살았으면, 지금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진 않았을 거다. 다른 영화는 악인은 악인으로 의인은 의인으로 마무리 하는데 <악의 연대기>는 영화가 끝나도 찜찜하다. 10명 중 3 분이라도 그런 기분에 자신을 돌아본다면 성공인 거 같다."

나도 모르게 어두웠던 과거 감정..."엄마, 이모 팬들도 다시 만나야죠"

그의 말대로 타협이 문제다. 우리 사회 소시민들이 모두 정의가 아닌 것에 조금씩 타협한다면 절망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최창식 역시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꽤 오래 전부터 손현주는 막연하게나마 이런 현실의 어두움에 빠졌던 거 같다. 앞서 언급한 최근작들이 손현주의 상태를 증명한다. "몇 년을 마치 검은색, 쥐색 계통의 작품만 했다. 다시 어머니 팬, 이모 팬들에게 돌아가야지"라며 그가 멋쩍게 웃었다.

분위기와 주제 의식은 크게 다르지만 진실한 연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손현주는 일관성이 있다. 손현주는 고 최진실과 호흡 맞춘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언급했다. "누가 집에서 슬리퍼 신고 옷을 차려 입고 사나, 맨발로 다니고 그러지"라며 그가 편한 복장을 제안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일상 연기로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배우 손현주.

배우 손현주. ⓒ 호호호비치


"가족 드라마에서 맨날 구박받는 캐릭터를 할 땐 좀 벗어나고 싶기도 했는데 지금은 너무 벗어났나 싶다. <추적자> 이후 지치도록 감정선을 끌고 온 게 사실이지. 보니까 한국 나이로 벌써 오십이더라. 대학로에서 공연하다 방송 연기를 했고, 영화도 하지만 긴 세월이라고 못 느꼈다. 초심을 유지하려 하는데 못 지키면 최창식처럼 되겠지. 대학로 무대엔 항상 미안함과 죄스러운 마음이 있다. 연극도 꼭 할 거다. 지금까지 기억하는 대사 중에 연극 작품인 게 많다. 방송 대본은 휘발성이 강해 잘 기억이 안 난다. 박경수 작가(<추적자> 집필) 작품은 예외다(웃음)."

24년의 연기 경력을 두고 손현주는 슬럼프는 없었다고 단언했다. 그의 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걸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뜻이다. "연기가 너무 힘들다고 느끼는 게 슬럼프는 아니다"라며 그는 "작품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에둘러 말할 뿐이지, 작품마다 한 구성원이 되려고 치열하게 했다. 그래서 주연, 조연에 대한 구분이 무의미한 것"이라 설명했다.

"요즘 후배들이 대단히 잘하고 있다. 그래서 걱정스럽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에 내가 방송 드라마를 시작했는데 그때 30분짜리 대본을 내게 던져주고 하라고 했으면 못 했을 거다. 사람들이 나보고 늦게 터졌다고들 하는데 늦게 된 건 이유가 있는 거다. 대학로 무대에 섰다가 TV 연기를 하는데 아무래도 서툴지. 요즘 젊은 배우들은 쉽게 배우고 빨리 익힌다. 기술적으로 뛰어난데 다만 그렇게 하다 보면 상대 연기를 받아줘야 할 때 못 받기도 한다. 연기는 교감이라 생각한다. 재능을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는지가 중요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손현주가 묵직하게 롱런할 수 있는 것도 연기하는 이유와 그 본질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손현주는 한국 영화계의 전진 기지 마련을 위한 '베이스  캠프' 같은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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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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