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로기수>의 한 장면

뮤지컬 <로기수>의 한 장면 ⓒ ㈜아이엠컬처


모든 것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종군 기자 베르너 비쇼프가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찍은 흑백 사진에는 수십 명의 포로가 머리에 복면을 뒤집어쓴 채 춤을 추고 있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라면 북한군 포로를 수용한 장소. 미군이 관리하는 포로수용소라면 북한 포로들은 이를 갈면 갈았지 춤을 출 이유가 하나도 없었을 텐데 왜 사진 속 포로들은 복면을 뒤집어쓴 채 춤을 췄을까.

<로기수>는 북한군이 포로가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과는 상반된 수수께끼 같은 한 장의 흑백 사진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사진이라는 팩트에, 이 사진에 들어있는 사건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에 대한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 뮤지컬이라는 이야기다.

사진 속 배경이자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1952년 거제 포로수용소는 언제든지 이념의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장소였다. 남한군과 북한군 포로를 섞어놓은 것도 아니고 북한군 포로만 수용한 곳인데 왜 이런 갈등이 빚어졌을까. 거제 포로수용소에는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공산주의 포로와 수용소에 있는 동안 북한의 사상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는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전향 포로가 있었다. 북한군 포로는 북송되기를 바라지만, 전향 포로는 북으로 돌아가는 것을 강하게 거부해 양측은 적대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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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의 주인공 로기수는 공산주의자다. 그것도 그냥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해방 동맹 단원이다. 로기수의 형 로기진은 해방 동맹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인물이다. 로기수의 어머니는 6.25 동란에 폭격으로 숨을 거둔다. 로기수가 전향 포로들처럼 남한과 미국을 증오했으면 증오했지 동화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이런 로기수에게 이율배반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거제 포로수용소장 돗드는 미군 보급품 절도범으로 몰린 로기수에게 절도범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적십자단이 거제 포로수용소를 찾아왔을 때 위문 공연을 하면 된다고 제안한다. 미군의 폭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미제라면 치를 떠는 인민공화국 전사에게 위문 공연을 하라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로기수의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마음은 미제라면 배격해야 옳지만, 미국 장교 프랜이 추는 탭댄스에 매료되어 로기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은 프랜의 탭댄스에 빠져든다. 형 로기진이 알면 청천벽력 같은 불호령이 떨어질 텐데도 로기수는 위문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탭댄스를 추고 또 춘다.

로기수가 탭댄스에 매료된다는 건 미국이 주입한 문화 주입의 여파에 물들어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미 제국주의자의 이념을 효율적으로 공산주의에 주입하기 위한 문화적 책략으로, 수용소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틀어주면서 북한군 포로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식 문물을 서서히 주입하는 것이다. 

이번 위문 공연을 무사히 마치면 프랜이 오키나와로 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로기수는 이념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거제 포루수용소를 벗어나고 싶은 바람에 춤을 연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춤은 미제의 문화 선전 도구이기는 하지만, 이념 갈등의 용광로인 포로수용소를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인 셈이다. 로기수에게 오키나와는 좌우의 이념을 초월하는 노스탤지어로 작용한다.

1막 후반부, 로기수가 날아오르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탭댄스를 갈망하는가를 보여준다. 마치 뮤지컬 <위키드>에서 초록 마녀 엘파바가 '중력을 넘어서'를 부르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로기수는 장치에 의지해 힘차게 날아다닌다. 탭댄스가 로기수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시각적 효과이면서, 동시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전쟁에서 한가하게 탭댄스나 춘다는 죄의식을 해방시켜 주는 시각적인 환기로 읽을 수 있는 연출이다.

 로기수를 연기하는 윤나무(왼쪽)와 로기진을 연기하는 홍우진(오른쪽)

로기수를 연기하는 윤나무(왼쪽)와 로기진을 연기하는 홍우진(오른쪽) ⓒ ㈜아이엠컬처


수용소장 돗드는 북한 포로들에게 문화 주입 교육을 펼침으로 말미암아 톡톡히 덕을 보는 캐릭터다.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미국 문화를 북한 포로에게 반복적으로 보여줌으로 북한 포로가 서서히 공산주의 사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덕에 반공 포로가 생기지 않았는가. 로기수 역시 돗드의 교화 대상이다. 공산 골수분자인 해방 동맹의 일원인 로기수가 적십자 위문 공연에서 미국 문물인 탭댄스를 춘다는 건, 돗드의 문화 세뇌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공산주의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걸 보여주는 확실한 방증이다.

로기수는 돗드의 문화 세뇌에 잠식당한 해방 동맹 단원일까, 아니면 북한에서는 접하지 못한 탭댄스라는 신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이념을 넘어서는 '댄스 홀릭'일까. 해답은 뮤지컬의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초연 이후 안타깝게도 퇴보의 길을 걷는 창작뮤지컬이 있는가 하면, <로기수>는 2015년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뮤지컬로 평가할 만하다.

2012년에 재연된 창작뮤지컬 <모비딕> 이후 3년 만에 인상적인 창작뮤지컬을 만났다. 이는 로기수를 연기하는 배우 윤나무의 공일지도 모른다. 북한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덕에 탈북자 배우를 기용했느냐는 평이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로기수 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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