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대형 재개봉 포스터

▲ 당산대형 재개봉 포스터 ⓒ 스크린조이


나는 아직도 2호선 당산역을 지날 때마다 이소룡을 생각한다. 그의 첫 주연작 <당산대형> 때문이다. 영화엔 당산이 등장하지 않고 등장한다 해도 2호선 당산역과는 관련이 없겠지만 나는 아직도 당산역을 지날 때면 곱상한 외모와 짙은 눈썹, 분노로 가득한 눈빛을 가졌던 한 사나이를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당산역을 지나치며 이소룡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 쯤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느덧 이소룡이 죽은지 40년이 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극장에선 볼 만한 액션영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성룡과 리암 니슨의 노익장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대체 그들은 올해로 몇 살이란 말인가? 나와 나의 동지들이 당산역을 지날 때마다 이소룡을 떠올리는 건 우리의 취향이 늙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나처럼 볼 만한 액션영화가 없다고 푸념하고 있을 이소룡 팬들이 기뻐할 만한 소식이 하나 있다. 전설의 액션스타 이소룡이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당산대형>과 함께다. 3월 19일 재개봉한 이 영화는 이소룡이 자신의 독문무술 절권도를 스크린을 통해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성룡과 이연걸, 견자단과 토니 쟈가 등장하기 이전에 1세대 액션스타로 자리매김했던 이소룡은 3년 동안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를 연이어 히트시키며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는 직접 각본,연출,주연까지 맡은 <사망유희>를 촬영하던 중 서른 셋의 나이로 돌연히 세상을 떠났는데 너무도 짧은 삶과 적은 작품이 그의 죽음을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당산대형>은 2013년 먼저 개봉한 <정무문> <맹룡과강>에 이어 세 번째로 재개봉하는 이소룡 주연작으로 한국에도 적지 않은 그의 팬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촌스런 연출 속에서도 빛나는 이소룡의 존재감

당산대형 클로즈업된 이소룡의 얼굴이 강렬하다

▲ 당산대형 클로즈업된 이소룡의 얼굴이 강렬하다 ⓒ 스크린조이


영화의 연출은 배우이자 감독인 나유가 맡았다. 오랜 연출 경력에도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었던 그는 중국 전통무술 쿵푸의 고수이자 아역배우 출신 이소룡을 내세워 <당산대형>을 찍어냈다. 그의 연출은 당시 홍콩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액션과 무협, 멜로와 공포, 코미디적 요소가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민낯으로 드러나는 이소룡의 독보적인 존재감 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나유가 찍어낸 수많은 평범한 작품들에도 그가 존중받아야 한다면 그건 오로지 이소룡을 액션스타로 키워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당산에서 온 청년 정조안(이소룡 분)이다.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며 살던 그는 당산이 수해를 입어 일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숙부의 소개로 허검(전준 분) 일행이 사는 지역으로 옮겨온다. 정조안은 허검의 소개로 그와 함께 얼음공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의로운 태도로 사람들에게 신망을 받는 허검에게 우정을 느낀다. 그러던 중 공장에서 직원들이 사라지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이에 대해 항의하려 사장의 집을 방문한 허검마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공장의 주임자리를 얻은 정조안은 허검과 직원들의 실종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사건의 배후인 사장과 맞서게 된다. 수해를 입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일자리를 얻은 청년이 모종의 음모에 휘말려 주먹을 휘두른다는 이야기가 줄거리의 전부이며, 악당두목과 주인공이 일대일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결말부에 배치되어 홍콩액션영화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당산대형>은 기본적인 설정과 구성에 있어 무협물의 영향을 두드러지게 내보인다. 새로운 지역에서 살게 된 주인공이 존경할 만한 선배와 동료들을 만나지만 악당에게 그들을 모두 잃고 복수에 나선다는 줄거리가 전형적인 협객 무협물과 유사한 것이다. 이 와중에 선배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고 악당에게 납치된 그녀를 구한다는 결말 역시 무협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에피소드이며 미인에게 수작을 거는 등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불량배를 응징하는 모습은 영화가 전형적인 선악구도를 차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늘린 악당이 선한 사업가로 위장한 채 가난한 사람들을 핍박한다는 설정은 주인공과 악당을 맞붙게 하기 위한 구실로 느껴질 만큼 전형적이다. 영화의 악당들은 외모와 행실 모두가 첫 등장부터 비겁하고 저열하게 느껴진다. 이에 반해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가난하지만 성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의 갈등은 주인공과 악당들 사이에서만 벌어지고 얼음공장과 사장의 저택을 벗어나서는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등장하는 인물들 전부가 공장에 관련된 사람들이며 몇차례 언급될 뿐인 공권력은 악당에게 매수되지도 약자의 편에서 정의를 유지하지도 않는다. 폐쇄적인 설정으로 전개되는 초창기 액션영화의 특성이 반영된 부분이라 하겠다.

전설이 된 이소룡의 이단 옆차기

당산대형 붉은 물감으로 피를 표현한 당시의 특수효과가 신선하다

▲ 당산대형 붉은 물감으로 피를 표현한 당시의 특수효과가 신선하다 ⓒ 스크린조이


슬랩스틱 코미디 가운데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액션에 차용한 성룡영화라거나 발전된 영화기술 아래서 정통무술 동작을 보다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이연걸,견자단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액션을 볼 수 있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감독인 나유가 세련된 연출자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당시 영화기술의 한계도 있었기에 <당산대형>의 액션은 투박한 편이다. 하지만 이소룡이 활약하는 순간 만큼은 남다른 멋이 엿보인다 하겠다. 이소룡은 특유의 절제되었지만 파괴적인 절권도의 동작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나유 감독은 적어도 이소룡의 멋스런 액션 만큼은 제대로 표현하고 있어 볼 만한 작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한다면 이소룡 특유의 폭발적인 주인공 캐릭터를 빚어냈다는 점일 것이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다혈질적인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이소룡의 모습은 그의 이후 영화들에서도 이어지는데 너무 적은 필모그래피 탓에 이것이 그대로 이소룡의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쌍절곤과 노란 트레이닝복처럼 유명해지진 못했으나 검정 고무신을 신고 감자칩을 먹으며 악의 소굴로 들어오던 그의 모습은 이소룡 팬들에게 만큼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더불어 지나치기 어려운 묘가수의 짧은 출연 역시도 이 영화를 기억하게 하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전반적으로 촌스럽고 투박한 부분이 많은 영화였지만 이소룡의 존재 만큼은 영화에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을 불어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주연작이 몇 편 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의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하겠다. <정무문>과 <맹룡과강>이 먼저 재개봉한 지금 <당산대형>은 이소룡의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일 것이다. 이소룡과 그의 액션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이번 개봉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소룡의 영화를 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특별한 지하철 역 한 개를 갖게 될 기회이기도 하다.

<당산대형>은 같은 날 재개봉하는 <모던 타임즈> <천녀유혼>과 함께 3월 19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당산대형 스크린조이 이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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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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