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민들레 바람 되어>에서 이광기가 연기하는 안중기는 요즘은 찾기 어려운 '순정남'일까. 아내가 있음에도 죽은 전(前) 아내를 잊지 못해 민들레꽃을 들고 무덤을 찾는 남자는 지금의 결혼 생활이 불행해서일까, 아니면 죽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애틋해서일까를 묻게 만든다.

<민들레 바람 되어>는 이광기가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연극이었다. 고난이도의 연기적 테크닉이 없어서가 아니다. 2011년 신종 플루로 세상을 떠나 보낸 둘째에 대한 아련함이, 아내를 떠나 보낸 안중기라는 캐릭터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광기가 출연을 결심한 까닭은 무얼까. 해답은 아래 인터뷰에 있다.

남자의 눈물샘 자극하는 <민들레 바람 되어>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에 출연하는 이광기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에 출연하는 이광기 ⓒ (주)수현재컴퍼니


- <민들레 바람 되어>는 중년 남성 관객도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민들레 바람 되어>는 주로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지만 자녀의 이야기도 나온다. '딸이 예식장에 들어올 때 당신인 줄로만 알았어, 왜 예식장에 나 혼자 남겨놓고 갔느냐'는 대사가 있다. 내 친구가 2011년에 이 공연을 관람했는데 그때와 달리 이 대사가 가슴을 때린다고 하더라. 딸을 시집보낼 때가 가까워지다 보니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또 2장에 '내가 정말로 힘든 건 내가 힘든지 아닌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야. 억지로 인생을 꿰어 맞춰 사는 것 같아, 빈 껍데기 뿐이야. 이렇게 힘이 드는데도 나는 항상 당신을 찾아와' 하는 대사도 있다. 이 대사를 할 때 가장 울컥한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지만 가족을 생각해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이런 점에 있어 가장은 다 똑같지 않을까 싶다. 가장으로서의 어려움을 남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있다가, 배우가 중년 남성 관객의 눈앞에서 연기할 때 관객의 입장에서 배우에게 자연스럽게 감정이입할 수 있다.

평생 울지 않다가 공연을 보고 찔끔 우는 남자 분도 있다.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클까'를 걱정하다가 울컥하는 관객도 있다. 사인회를 할 때 초등학생이 있었다. '연극 내용을 알겠니? 내용을 알면 넌 천재야'라고 이야기해 주니 '저 울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너 어디서 울었어?'하고 되물어보니 '아저씨(이광기)가 핸드폰 보고 울 때'라고 하더라. 내가 울면서 연기하는 걸 보고 따라 울었다고 한다. 우는 관객의 연령 폭이 넓다."

- 안중기는 새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도 사별한 아내를 잊지 못한다.
"사람은 첫 번째로 구매한 물건이나 처음으로 만난 사람, 첫 자동차와 첫 아이를 잊지 못한다. 아내는 남자의 첫 번째 여자다. 사별한 아내는 안중기에게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첫 여자인 아내를 합의하고 떠나보낸 게 아니라 죽음이라는 운명에 의해 아내를 떠나야 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죽은 사람에 대한 미안함이라는 게 있다. 그러면 남겨진 사람은 나도 모르게 죽은 사람에게 발걸음이 옮겨진다. 죽은 아내 무덤에서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세월의 추억을 쌓는 거다."

- <민들레 바람 되어>를 공연하며 '부부는 무촌(촌수가 없다)'이라는 말에 공감할 듯한데.
"배우자에게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받으려고 하다가 배우자에게 피드백을 받지 못하면 서운하다. 배우자에게 받으려고 생각하지 않다가 무언가라도 받으면 배우자에게 고맙게 된다. 배우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걸 계속 생각하면 배우자 역시 나에게 잘 해주게 되어 있다."

"아내의 반대...하지만 마음껏 울었다"

 "둘째를 잃었을 2011년 당시에는 힘들었던 때였다.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 가면 힘이 들고, 돌잔치는 아예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민들레 바람되어> 대본을 다 읽어보니 '관계 회복'이 보였다. 관계 회복이라는 메시지가 보이는 순간, 이 연극을 해야 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둘째를 잃었을 2011년 당시에는 힘들었던 때였다.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 가면 힘이 들고, 돌잔치는 아예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민들레 바람되어> 대본을 다 읽어보니 '관계 회복'이 보였다. 관계 회복이라는 메시지가 보이는 순간, 이 연극을 해야 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 (주)수현재컴퍼니


- 과거 신종 플루로 둘째를 잃었다. 그 기억 때문에 죽음을 소재로 한 이번 연극 출연을 고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출연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죽음은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을 통해 기쁨이 있으리라고 본다. 현재 함께 하고 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슬픈 게 맞다. 하지만 남미의 어느 부족은 또 다른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라고 생각해서 장례식이 축제 분위기라고 한다.

둘째를 잃었을 2011년 당시에는 힘들었던 때였다. 장례식장이나 결혼식장에 가면 힘이 들고, 돌잔치는 아예 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민들레 바람 되어> 대본을 다 읽어보니 '관계 회복'이 보였다. 관계 회복이라는 메시지가 보이는 순간, 이 연극을 해야 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아이티 지진 구호를 위해 아이티에 다녀온 적이 있다. 무정부 상태라 총소리와 칼부림이 난무하던 때다. 또 다시 지진이 날까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눈이 풀려 있더라. 지진으로 고통 받는 아이티 사람들을 보는 가운데서 '세상에는 나만 아픈 게 아니다' '나는 감당할 수 있는 아픔을 겪었다, 나보다 더 힘든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세상에서 봐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민들레 바람 되어>를 한다고 할 때 아내가 반대했다. 남자는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어 울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극 연습을 하면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연극을 핑계로 울었지만 배역에 빠져들고 보니 배역 때문에 울었다. 특히 대사 중에 '당신(죽은 아내)은 그대로인데 나는 없고 나였던 사람만 있더라' 할 때, 사진 속 둘째 아이는 그대로지만 아버지인 나는 계속 나이를 먹는다는 게 가슴에 무척이나 와 닿으면서 먹먹했다."

"갑은 씨앗을 뿌리고, 을은 새싹이 돋아서"

 "처음에는 연극을 핑계로 울었지만 배역에 빠져들고 보니 배역 때문에 울었다. 특히 대사 중에 '당신(죽은 아내)은 그대로인데 나는 없고 나였던 사람만 있더라' 할 때, 사진 속 둘째 아이는 그대로지만 아버지인 나는 계속 나이를 먹는다는 게 가슴에 무척이나 와닿으면서 먹먹하다."

"처음에는 연극을 핑계로 울었지만 배역에 빠져들고 보니 배역 때문에 울었다. 특히 대사 중에 '당신(죽은 아내)은 그대로인데 나는 없고 나였던 사람만 있더라' 할 때, 사진 속 둘째 아이는 그대로지만 아버지인 나는 계속 나이를 먹는다는 게 가슴에 무척이나 와닿으면서 먹먹하다." ⓒ (주)수현재컴퍼니


- 얼마 전에 <한밤의 TV 연예>에서 "출연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고 했다.
"편해서 한 말이다. 사실 수현재컴퍼니(배우 조재현이 수장으로 있는 공연제작사-편집자 주) 담당자들이 계약서를 쓰자고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공연 끝나기 전까지만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편하게 지내는 사이다. 계약서야 시간 날 때 쓰면 된다.

갑과 을의 인식이 잘못되었다. 잘나서 갑이 되는 게 아니다. 갑과 을은 상호협력 관계여야 한다. 갑이 잘 되면 을을 끌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갑이 너무 독보적으로 비쳐진다. (조)재현이 형과의 갑을 관계는, 재현이 형이 우리 배우들을 통해 좋은 연극을 만들고 대중이 연극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선순환 관계의 갑과 을이다.

나 역시 무대를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며 언젠가는 재현이 형처럼 무대나 대중문화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재현이 형과 나처럼 갑은 씨앗을 뿌리고, 을은 새싹이 돋아 자라 갑이 되어 을인 후배들에게 자양분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갑과 을의 관계는 순환이어야 한다."

민들레 바람되어 조재현 이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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