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 : 회오리바다>

영화 <명량 : 회오리바다>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명량>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가장 우려했던 점이 두 가지 있었다. 첫째로 61분이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전투신이 영화의 완성도를 망칠 정도로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또 <명량>이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위인적 면모만을 강조하며 '그저 그런 영화'에 머무는 한계를 보이지 않을지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명량>의 뚜껑을 열어 젖힌 뒤에는 이 같은 노파심이 울돌목의 회오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충무공>도, <이순신>도 아닌 <명량>이다. 영화 <명량>이 '위인 이순신'보다 '명량해전'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영화임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이순신이라는 한 인물에 천착하지 않은 영화

대개 역사 속 입지전적 인물을 콘텐츠의 형태로 가공할 때 주인공을 전형적 위인의 틀 안에 끼워 넣으며 그의 일생 속 굵직한 사건들을 주인공 개인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명량>은 이러한 경향과 결별하고 '명량해전'이라는 사건을 내러티브의 전면으로 끌어오는 과감한 선택을 하며 우려의 한 부분을 불식시켰다.

<명량>의 이러한 특색은 영화 안에서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우선 독이 됐던 지점은 영화 <역린>의 감정선이 관객들의 공감을 크게 이끌어내지 못했던 부분과 유사하다. 이재규 감독의 <역린>은 역사적 사건 '정유역변'에 상상력을 가미해 암살될 위험에 처한 주인공 정조(현빈 분)의 험난한 하루를 그렸다. 신선한 시도에도 <역린>은 인터넷 소설 속 전형적인 먼치킨(터무니없이 강한 능력을 가진 존재) 주인공 같은 정조의 위기 대처력과 배우 현빈의 미적인 면모만을 부각하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주인공의 상황과 심리를 성의있게 묘사하지 않은 탓으로 영화적 완성도에 다소 흠집이 간 것은 <명량>도 마찬가지다. <명량>이 해전에 집중한 것은 결과적으로 올바른 선택이었지만, 당시 조정으로부터 미움받아 축출당한 것은 물론 죽음의 위기에까지 처했던 이순신(최민식 분)의 상황과 심경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단순히 표현된 부분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약점을 상쇄하는 부분은 극 중 인물들의 대사가 최소화된 대신 그들의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일반적인 클로즈업보다 대상에 더 접근해 인물의 경우, 얼굴 부분만을 찍는 기법)으로 잡아낸 연출이다.

특히 주인공 이순신의 얼굴은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화면에 점점 타이트하게 잡히는데, 이는 어떤 위기에도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줄만 알았던 이순신의 눈동자며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했다. 이는 <명량>이 이순신이라는 한 인물에 천착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번듯한 대사보다 관객들의 감정을 흔드는 효과를 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 '백성의 힘' 보여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영화 <명량>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명량>이 해전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했던 약점을 품고 있는 동시에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가장 큰 우려를 샀던 부분이지만 이 영화의 백미이기도 한 61분의 해상 전투 장면은, 단순히 요란하게 흔들리는 배에 부딪치는 파도나 총칼, 유혈과 같은 클리셰의 무한 반복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명량>은 인간의 의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이순신의 간결한 지휘로 변화하는 순간을 붙잡아내며 그 단순한 그림의 연속만으로도 이야기를 만든다.

전쟁을 주로 다룬 영화들을 보더라도 전투 중 상황이 변하는 찰나에 별다른 이유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인데, <명량>의 해상 전투는 장면과 장면의 이음새를 전부 이순신의 전술이 메우고 있다. 다만 컴퓨터 그래픽이 적용된 몇몇 장면에서 마치 물살을 그린 뒤 오려 배 밑 부분에 붙인 것 같은 어색함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장면들은 객석을 울릴 정도로 엄청난 사운드와 함께 바다라는 공간의 매력을 극대화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전투신을 그렸을지도 모르는 <명량>에도 판타지가 끼어들었다는 점이 약일지, 독일지는 관객들의 판단에 맡겨야 할 듯하다.

이를테면, 이순신이 잠망꾼으로 부리던 임준영(진구 분)과 정씨 부인(이정현 분)은 <명량> 속 백성을 대변하는, 보편적 감동을 맡은 캐릭터다. 극한의 두려움을 용기로 치환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라 믿었던 백성들이 울돌목에서의 전투가 위기를 맞을 때쯤 이순신의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死 死卽必生)'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장면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백성의 경계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백성을 말하려 했던 <군도>에 비해 훨씬 쉽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백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기 때문에 단순하지만 효율적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처럼 <명량>은 여타 위인이 등장하는 영화에 비해 주인공을 과도하게 우대하지 않고 사건에 공을 들이는 파격적 행보에 따랐던 몇 가지 우려들에 훌륭한 대답을 제시하며 앞으로 나올 유사한 영화들의 귀감이 됐다. 또 <명량>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른바 '밀덕(밀리터리 오타쿠·군대와 관련된 전반적 문화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들의 구미를 동시에 맞출 수 있는 기민한 영화임에도 틀림없다.

이순신이 12척의 배로 3백 척이 넘는 왜군을 막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했을 때, 그는 아들 이회(권율 분)에게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는 순간 그것이 무서운 힘을 낸다고 말한다. <명량>은 영웅 이순신의 말과 행동을 빌어 그 추상적인 전략을 현실로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대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영웅만이 아니라 백성과 같은 범인(凡人)들이기도 함을 말하고 있었다.

(추신. 멀미가 있으신 분들은 주의하세요)

명량 이순신 최민식 울돌목 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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