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 2013년 4월 4일,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 앞서 잠실야구장에서는 1982년 바로 그곳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했던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들의 시구와 시타 행사가 있었다.

▲ 시구 2013년 4월 4일,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 앞서 잠실야구장에서는 1982년 바로 그곳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했던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들의 시구와 시타 행사가 있었다. ⓒ 인디스토리


지난 4월 4일, 잠실야구장.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 앞서 이색적인 시구 행사가 벌어졌다. 낯선 중년의 사내 다섯 명이 그라운드에 올랐고, 그중 양시철이라는 이가 시구를, 김근이라는 이가 시타를 맡았다.

"1982년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했던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멤버들"이라는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가 있었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장내 아나운서가 박수를 청하자 얼떨결에 박수와 함성이 터졌고, 그 소리에 긴장했는지 연습 때는 제법 싱싱한 스트라이크를 연신 꽂아 넣으며 자신만만했던 시구자 양시철은 타자 앞 멀찍이에서 땅바닥에 처박히는 원바운드 볼을 던지고 말았다.

그들을 초대하고 두산 베어스의 협조를 얻어 시구 행사를 성사시킨 이는 바로 김명준 감독이었고, 그 행사는 그가 만들고 있던 다큐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의 한 장면이 되기도 했다. 지난 2006년에 개봉해 영화계와 일본 재일동포 사회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던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에 이어 재일동포에 초점을 맞춘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잠실야구장, 낯선 이들의 시구

"처음에 조은성 피디가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대한 다큐를 만든다고, 자문을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만나면서 조언도 해주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직접 연출을 해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안 한다고 했어요. 제가 야구에 별 관심도 없고, 또 재일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이 한국의 권력층과 연결돼서 기획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오해도 있었고…. 그런데 자료들을 좀 더 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민단과 조총련의 문제와 관계없이 이뤄진 일이었고, 또 꼭 야구가 아니더라도 이 소재 안에 정말 조명해볼 만한 사연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또 하다 보니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고요."(김명준 감독)

재일동포 야구단의 한국방문경기는 1956년부터 시작됐다. 재일교포 2세들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한국의 야구계에는 선진야구의 자극을 주자는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의 의지가 담긴 시도였다. 일본의 여러 학교에서 선수로 활동 중이던 이들을 모아 한국 곳곳의 강팀들과 순회경기를 갖도록 하는 이벤트였는데, 모국의 학생야구 선수들을 압도하며 기술적인 자극을 주는 동시에 배수찬(1957년)·장훈(1958년)·김성근(1959년) 같은 이들이 한국야구와 직·간접적인 인연을 맺고 한국야구 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50~1960년대에 많은 분들이 모국을 방문했다가 환대를 받으며 감격을 했어요. 일본에서는 그냥 평범한 야구선수일 뿐이었는데, 한국에서는 다들 감탄하고 환호하고, 하나라도 배우려고 하고. 그런 경험을 하면서 한국에 오면 야구선수로서 사는 길을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신 분들이 많이 있었고, 그런 분들이 한국으로 건너와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한국야구의 수준이 많이 올라갈 수 있었죠."(김명준 감독)

한국야구가 처음으로 일본에 승리했던 196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멤버들이었던 신용균·서정리·배수찬·박정리를 비롯해 실업야구 시대 최고의 투수였던 김영덕·김성근 등은 모두 재일동포 2세들이었다. 그들 덕에 한국야구는 기술과 작전과 분석을 배웠고, 국제대회에서 종종 필리핀과 대만을, 가끔은 일본까지 이기며 아시아 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이 학생야구와 실업야구 그리고 프로야구팀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세계 수준에 도전해볼 수 있는 숱한 유망주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야구 전도사' 혹은 '반쪽발이'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재일동포야구단이 선 서울운동장의 그라운드. 뒤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이 내건 '필승'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재일동포야구단이 선 서울운동장의 그라운드. 뒤로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이 내건 '필승'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 인디스토리


하지만 그들에 대한 모국 사람들의 시선이 찬사와 감사로만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야신'으로까지 추앙받으며 이 시대 최고의 멘토로 꼽히는 김성근 감독 역시 여전히 종종 '반쪽발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다.

특히 일본에 대한 경제적인 열등감과 역사적인 분노가 지금보다 더 심했던 과거, 한국인들의 재일교포에 대한 태도는 극단적인 두 겹으로 이뤄져 있었다. 잘 사는 선진국 시민이라는 동경이 한 겹 그리고 원수의 나라 일본에 동화돼 버린 배신자라는 멸시가 또 한 겹. '반쪽발이'란 재일동포에 대한 그런 비뚤어진 시선의 한 면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순회경기로 이뤄지던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 행사가 1971년부터는 봉황기 고교야구대회에 재일동포팀을 구성해서 참가하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1974년과 1982년에는 재일동포야구단이 준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참가했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기억들이 있어요. 1·2회전을 치를 때는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응원해주던 분들이 결승전에서는 '반쪽발이'라고 비난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상대 학교를 응원하던 장면들이죠. 당시에 대회 주최 측에서도 '반쪽발이'들에게 우승컵을 넘겨서야 되겠느냐는 말들을 공공연히 했고, 심판들의 편파적인 판정도 감수해야 했어요."(조은성 <그라운드의 이방인> 기획자 겸 프로듀서)

그런 경험들이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선수들에게는 그리 가볍지 않은 기억으로 남게 됐다. 그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일본에서도 한국인임을 드러내고 사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일본으로 돌아가자마자 귀화 절차를 밟게 하기도 했다. 김명준 감독은 그들을 찾아다니며 그때의 경험과 그 뒤의 삶에 대해 들었고,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 전화 통화를 하면서 '당신이 참가했던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을 때, 어떤 분들은 '다시는 한국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고, 또 어떤 분은 '혹시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니냐'며 의심하기도 했어요. 이미 귀화를 해서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분들도 있었고, 여전히 귀화하지 않은 분들도 있었어요." (김명준 감독)

어떤 이는 야구선수로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모색으로, 또 어떤 이는 그냥 공짜 관광 하는 셈 치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하지만 그 뒤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귀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자이니치'(재일동포)라는 사실을 드러낼 것인가 감출 것인가 혹은 남쪽인가 북쪽인가를 놓고 쉽지 않은 선택을 강요받게 됐다. 일본에서 귀화하지 않은 '자이니치'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숱한 불이익과 편견의 대상이 돼야 함을 의미했으며, 특히 조총련계 가정의 학생들에게 '야구를 위해 남쪽으로 간다'는 것은 이념과 가족들마저 배신하는 행위로 비쳐지곤 했기 때문이다.

김명준 감독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역사를 추적한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우리 학교>(2006)에 이어 재일동포 문제를 다룬 김명준 감독(가운데)의 두 번째 작품이다. 오른 쪽은 1982년 재일동포야구단 투수로서 결승전까지 6경기를 모두 완투했던 양시철 씨.

▲ 김명준 감독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역사를 추적한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우리 학교>(2006)에 이어 재일동포 문제를 다룬 김명준 감독(가운데)의 두 번째 작품이다. 오른 쪽은 1982년 재일동포야구단 투수로서 결승전까지 6경기를 모두 완투했던 양시철 씨. ⓒ 인디스토리


"그렇게 엄청난 결정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저히 혼자여야 했다는 것도 하나의 비극입니다. 사실 재일동포야구단의 팀웍이 약했던 것은, 다들 한국에 오면서 처음 만난 사이여서 그래요. 조선학교 출신도 있고, 일본 학교 출신도 있고. 그래서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고…." (김명준 감독)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멤버들의 한국 프로야구 시구 행사를 기획하며, 김명준 감독은 그것이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의 젊은 팬들에게는 재일동포들이 한국야구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 알리고,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들에게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한국이 잊지 않았다는, 감사의 표시를 뒤늦게나마 전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팬들은 그냥 얼떨결에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내줬어요. 아직 그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시구를 하셨던 선수단 분들은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감격하셨어요. 30년 전에 한국을 찾아 야구를 했던 경험을 소중하게 다시 생각하게 된 거죠. 이런 장면들을 보면서 한국의 관객들과 재일동포 분들은 각각 어떻게 보실지 궁금해요."(김명준 감독)

한국에서의 일곱 번째 완투승

친선경기 시구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들은 한국의 독립영화인들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그 경기에서 다시 7이닝을 완투한 양시철은 '한국에서 저의 일곱 번째 완투승입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 친선경기 시구를 위해 한국을 찾은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들은 한국의 독립영화인들과 친선경기를 가졌다. 그 경기에서 다시 7이닝을 완투한 양시철은 '한국에서 저의 일곱 번째 완투승입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 인디스토리


시구 행사를 마친 재일동포야구단은 며칠 뒤 독립영화 스태프들로 구성된 사회인 야구팀 '오버런스'와 친선경기를 치렀다. 하지만 한국을 찾은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는 5명뿐이었고, 그래서 4명의 '깍두기'를 구한다는 소식에 난데없이 '재일동포'라는 한자가 새겨진 유니폼을 빌려 입고 끼어들었던 것이 내가 이 영화와 인연을 맺은 계기였다.

그 날 5-2로 재일동포 야구단이 승리를 거두며 경기가 끝난 뒤 7이닝을 완투한 승리투수 양시철씨는 소감의 첫 마디를 이렇게 꺼냈다.

"오늘 이 경기가, 한국에서 저의 일곱 번째 완투 경기였습니다."

1982년 봉황기 대회 때, 팀이 보유한 유일한 투수였던 그는 대회 여섯 경기를 모두 완투했고, 그렇게 누적된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승전에서 결국 조계현이 있던 군산상고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섯 번의 완투승과 한 번의 완투패로 일단락됐던 그와 한국의 인연은, 30년 만에 다시 한 번의 완투승으로 유쾌하게 고개를 들었다.

"30년 전에 섰던 잠실야구장의 마운드에서(1982년 봉황기 고교야구대회는 대회 역사상 유일하게 일부 경기를 잠실야구장에서 치렀다) 시구를 해달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30년 전 결승전의 그날처럼 야유와 욕설이 쏟아지면 어떻게 하나, 또다시 '쪽발이는 너희 나라로 가라'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하나 겁도 났습니다.

하지만 막상 마운드에 오르고 한국의 관중들이 열렬하게 박수와 환호를 보내주시는 순간 너무 기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30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한국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끄러운 것은, 공이 원 바운드로 들어갔다는 점입니다."(양시철·1982년 재일동포야구단 투수)

김근·권인지·배준한. 다른 멤버들도 소감을 말하며 한국 야구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과 '기쁘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리고 함께 경기했던 멤버들이 언젠가 일본을 찾아와준다면, 그리고 미리 한 달 쯤 전에만 알려준다면 나머지 멤버들도 찾아내고 철저히 연습한 뒤 1982년도 재일동포야구단의 진짜 야구실력을 보여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저는 잠실야구장에서의 시구보다도, 오히려 그 친선경기와 그 뒤풀이 자리가 더 감동적이었어요. 제가 원래 부산 쪽 출신이라서 롯데 야구는 가끔 보지만, 야구팬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정말 야구라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 되는구나, 그리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김명준 감독)

어쨌든 <그라운드의 이방인>에는 재일동포야구단을 결성해 조국의 남쪽을 찾았던 이들을 찾아나서고, 만나거나 거절당하고, 함께 웃거나 울고, 또 카메라를 끈 채 이런저런 비밀스럽고 곤혹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며, 그중 몇 분을 한국에 모셔 프로야구 경기가 벌어지는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를 한 이야기들이 담기게 됐다. 물론 나도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으니, 그 외에 또 무슨 이야기가 담기고, 그 이야기들은 또 어떻게 그려질지 알지는 못한다.

"정말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모르고,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거예요. 그리고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야구의 씨앗을 뿌린 건 재일동포들이었어요. 이번에 북송선과 북한 땅에서 야구를 한 귀한 기록들을 구해서 영화에 담을 수 있게 됐어요. 그런 귀한 자료들도 많이 담길 거예요."(조은성 프로듀서)

2009년부터 시작해 무려 5년여간의 촬영을 거의 마친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내년 봄 개봉을 목표로 지금은 편집과 후반부 작업 중이다. 물론 스태프들이 자원봉사 수준의 헌신적인 참여로 아껴가며 썼음에도 제작비가 바닥나며 후반제작비와 개봉비용 2000여만 원이 부족하지만, 한일 양국의 뜻있는 후원자들을 통해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늘 그랬듯 척박한 땅에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시도를 가능하게 지켜줬던 한국 독립다큐영화의 적지만 소중한 관객들, 특히 김명준 감독의 전작 <우리 학교>를 통해 다큐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재일동포들에 대한 인식을 얻은 이들 그리고 한국야구의 뿌리에 관심을 가진 진지한 야구팬들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는 계산이기도 하다.

영화 보면서 미안함 느끼면 좋겠다는 감독

"저는 이 영화를 보고 한국인들이 재일동포들에 대한… 일종의 미안함을 느끼면 좋겠어요."

각각 여러 해의 시간과 엄청난 노력 그리고 그 밖의 적지 않은 개인적인 희생들을 쏟아부어가며 재일동포의 문제에 집중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김명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알 듯 모를 듯했지만, 나는 그 의미를 대략 이렇게 떠올렸다. 잠실야구장에서 시구하는 그들을 보며 건성으로 박수를 치던 한국인들, 하지만 그 모습에서 엄청난 감동을 느끼고 감격하는 재일동포야구단 선수들. 그 장면을 다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면서 재일동포야구단 멤버들이 30년 전의 경험을 다시 한 번 긍정적으로 조명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한국인들에게는 '진심으로 박수를 치지 못한' 그 순간에 대해 다시 미안함을 느끼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예컨대 아쉽고 필요할 때는 부르고 모시고 챙기다가 이제 야구 수준도 어느 정도 올라가고 외환위기가 터지며 당장 주머니도 좀 팍팍해지던 1990년대 말, 재일동포야구단 초청 행사를 일거에 중단시켜버렸던 일처럼, 재일동포들을 향했던 우리 안의 모순되고 얄팍하며 근본적으로는 무관심했던 시선을 스스로 발견하고 부끄러워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 제작비 후원 참여 : <펀딩21> (www.funding21.com)
제작비 모금을 위한 토크쇼 : 8월 11일 오후 4시.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김명준 재일동포야구단 그라운드의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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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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