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SBS 월화드라마 <야왕>에서 수애의 악행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성공과 야망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매몰차게 버리는 악녀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것이다. 재밌게도 수애의 악행이 더하면 더할수록 드라마의 몰입도는 높아지고, 시청률도 상승하고 있다. 악녀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말이다. 궁금해진다. 대한민국 드라마 55년사를 빛낸 악녀들은 과연 누가 있었을까. 여기 수애 뺨치는 악녀들이 있다.

 오른쪽쪽상단부터 <구미호>의 송윤아, 김지영, < M >의 심은하 (시계 반대방향)

오른쪽쪽상단부터 <구미호>의 송윤아, 김지영, < M >의 심은하 (시계 반대방향) ⓒ MBC,KBS


① 한 맺힌 여자들 : 처녀귀신부터 구미호까지

악녀라면 우선 공포드라마 여 주인공들은 첫 손에 꼽아야 마땅하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캐릭터는 역시 KBS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다. 1977년 1대 구미호 한혜숙을 시작으로 장미희, 김미숙, 선우은숙, 차화연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 차례로 구미호를 연기했다. 당시 방송가에서는 "구미호를 연기해야 톱스타로 대접받는" 분위기여서 여배우들끼리 구미호 캐릭터를 맡기 위해 보이지 않는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구미호 캐릭터는 1989년 <전설의 고향>이 폐지되면서 그 계보가 일시적으로 끊기기도 했으나 1996년 <전설의 고향>이 부활함으로써 박상아, 송윤아, 노현희, 김지영 등이 차례로 구미호에 캐스팅 돼 열연을 펼쳤다. 특히 1997년 방송 된 송윤아의 구미호는 여전히 인구에 회자될 만큼 탄탄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자랑하는 명작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2010년 제작 된 한은정 주연의 <구미호 : 여우누이뎐>의 모티브로도 유명하다.

<전설의 고향>이 과거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었다면, 1990년대에는 주 무대를 현대로 옮긴 공포 드라마가 대거 제작됐다. 1994년 MBC 납량특집 드라마 < M >이 대표적이다. 정세호 PD와 이홍구 작가가 연출과 극본을 맡았고, 배우 심은하가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돼 52.2%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이다. 파래지는 심은하의 눈동자와 변조된 목소리는 여러 예능 프로그램이 패러디 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M>의 대성공 이 후 <거미>의 이승연, <별>의 고소영-이소라 등이 납량 특집극의 히로인으로 활약했고 SBS <고스트>의 명세빈, KBS 2TV <RNA>의 배두나가 명맥을 이어나갔다.

 역대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들 왼쪽 상단부터 김지미,남정임,윤여정,이미숙,김혜수,정선경,전인화 (시계 방향 순)

역대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들 왼쪽 상단부터 김지미,남정임,윤여정,이미숙,김혜수,정선경,전인화 (시계 방향 순) ⓒ MBC,KBS


② 역사 속의 악녀들 : <장희빈>부터 <장녹수>까지

전설 속의 구미호보다 더 지독한 '역사 속의 악녀'도 있었다. 숙종의 악처이자 조선 최고의 악녀로 불리는 '장희빈'이 좋은 예다. 1대 김지미를 시작으로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김혜수, 이소연이 장희빈을 연기했다. 장희빈 역시 톱배우라면 반드시 연기해야 할 캐릭터 중 하나로 손혔힌다. 오는 3월 방송 될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는 미녀배우 김태희가 9대 장희빈으로 캐스팅 돼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도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다. 연산군의 무한한 사랑과 조선 사림의 끝없는 증오를 한 몸에 받았던 희대의 요부 장녹수는 치명적 섹시함과 강렬한 개성을 자랑하며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캐릭터다. 1971년 <사모곡>의 고은아를 비롯해 <설중매>의 이미숙, <연산군>의 강수연, <왕과 비>의 이혜련 등이 장녹수를 거쳐 갔는데, 그 중 1995년 <장녹수>의 박지영은 단연 압권이라 할 만한 연기로 대중의 큰 찬사를 받았다.

"연산에게 녹수가 있다면, 광해에겐 개시가 있다"는 말을 낳은 김개시도 여러 번 극화된 역사 속 악녀다. 인목대비의 폐위를 비롯해 대북 정권의 창구 역할을 하면서 광해군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김개시는 훗날 선조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는 등 선조와 광해군 시대를 통틀어 가장 권력에 근접해 있던 여성이었다. 지금까지 <회천문>의 원미경, <서궁>의 이영애, <천둥소리>의 이주화, <왕의 여자>의 박선영이 김개시를 연기했다.

 무서운 시어머니들, 박주아,여운계,김용림,박원숙(왼쪽부터)

무서운 시어머니들, 박주아,여운계,김용림,박원숙(왼쪽부터) ⓒ MBC,KBS


③ 무서운 엄마들 : <여로> '박주아'부터 <백년의 유산> '박원숙'까지

이 세상 며느리들에게 구미호, 장희빈보다 무서운 존재는 아마 '시어머니'일 것이다. 역대 드라마들 속에서도 시청자들의 간담을 서늘한 게 한 시어머니들은 여러 번 등장했다.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72년 방송 된 KBS 드라마 <여로>의 박주아를 첫 손에 꼽을 수 있겠다. 시집 온 며느리 태현실을 상대로 모진 학대와 구박을 서슴지 않았던 박주아의 명연기는 이 후 탄생할 수많은 시어머니 캐릭터의 교과서적 표본이 된다.

1975년 인기를 끌었던 KBS <마부>의 여운계도 악독한 시어머니의 전형을 보여준 케이스다.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시어머니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한 여운계는 너무 뛰어난 연기 탓에 본의 아니게 시청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 여운계가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잘~하는 짓이다"라는 대사는 당시 유신시대를 풍자하는 말로 유행처럼 퍼지기도 했다.

1977년 MBC <후회합니다>의 김용림도 빼 놓으면 섭섭하다. 1961년 데뷔 이래 무서운 시어머니나 엄한 어머니 역을 도맡아 한 김용림은 <후회합니다>에서도 며느리 김혜자를 오해해 지독하게 괴롭히는 시어머니로 분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김용림의 아들 남성진은 "<후회합니다>가 너무 히트를 치는 바람에 어머니가 무서운 시어머니로 인식 돼 결혼하기 힘들었다"는 나름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70~80년대에는 박주아, 여운계, 김용림, 강부자 등 풍채 좋은 중견 연기자들이 주로 시어머니 역을 연기했다면, 90~2000년대는 박원숙, 김자옥, 이휘향, 양금석, 박해미 등 화려한 왕비풍의 여배우들이 못된 시어머니 역할을 자주 했다. 최근 MBC <백년의 유산>에서 여주인공 유진을 괴롭히는 역할로 출연 중인 박원숙은 과거에도 <별은 내 가슴에> <겨울새> 등으로 야누스적이고 비열한 시어머니 연기의 진수를 보여준 배우다.

2000년 KBS 일일드라마 <좋은걸 어떡해>에서 보여준 김자옥의 연기 또한 일품이었다. 젊은 시절 멜로드라마의 가련한 여주인공으로 활약했던 김자옥은 <좋은걸 어떡해>에서 아들 정보석과 결혼한 이혼녀 정선경을 매몰차게 구박하는 히스테리 연기를 펼쳐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바 있다. 김자옥의 확실한 연기변신에 힘입어 <좋은걸 어떡해>는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3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왼쪽부터 <모래성>의 김청과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왼쪽부터 <모래성>의 김청과 <내 남자의 여자>의 김희애 ⓒ SBS, MBC


④ 뻔뻔한 불륜녀들 : <모래성> '김청'부터 <내 남자의 여자> '김희애'까지

예나 지금이나 불륜 드라마는 여성들이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 장르 중 하나다. 불륜극의 원조를 따지자면 1969년 MBC <개구리 남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불륜 드라마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킨 것은 1988년 MBC <모래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작가가 집필을 맡고 김혜자와 박근형이 부부로, 김청이 박근형의 내연녀로 출연한 작품이다.

8부작으로 기획된 만큼 스피디하고 대담한 사건 묘사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주부들 사이에는 이른바 '모래성 신드롬'이 불기도 했다. <모래성> 방영 당시 우리나라는 서울 올림픽 기간이었는데, 드라마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MBC는 올림픽 중계를 포기하고 <모래성>을 방송할 정도였다. 덕분에 <모래성>은 서울 올림픽 기간 중 유일하게 정규 방송된 드라마로 기록됐다. 배우 김혜자는 이 작품으로 1988년 MBC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드라마작가 김수현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2007년, <모래성>의 확장판 격인 SBS <내 남자의 여자>를 세상에 내놓으며 다시 한 번 신드롬을 일으켰다. 김희애의 파격적인 불륜녀 연기가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은 자극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 내면의 외로움을 냉철히 파고들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최고 시청률은 36.8%로 그 해 SBS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높았고, 덕분에 김희애는 2007년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MBC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의 지수원, SBS 주말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의 김희정, 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김서형 등이 뻔뻔한 불륜녀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하며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한 바 있다.

 복수극의 히로인들, 왼쪽상단부터 심은하,채시라,장서희 (시계 방향)

복수극의 히로인들, 왼쪽상단부터 심은하,채시라,장서희 (시계 방향) ⓒ MBC,KBS,SBS


⑤ 복수극의 히로인들 : <청춘의 덫> '심은하'부터 <아내의 유혹> '장서희'까지

남자에게 버림 받은 드라마 속 여자들의 복수는 그 무엇보다 차갑고 매섭다. 복수극의 원조를 말하라고 한다면 1979년 MBC에서 방송 된 <청춘의 덫>이 맨 앞에 서야 할 것이다. 돈과 명예를 좇는 남자 이정길과 그에게 버림받은 후 복수를 꿈꾸는 여자 이효춘의 대립구도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이 작품은 혼전임신, 미혼모, 복수 등 자극적 소재로 인해 조기 종영된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인기가 높았던 탓에 동명의 영화와 소설로 제작되며 세간의 화제가 됐다.

<청춘의 덫>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9년으로, 원작자인 김수현 작가가 "79년에 못 다한 이야기를 하겠다"며 SBS에서 리메이크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톱 여배우였던 심은하가 주연을 맡아 열연한 이 작품은 5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1999년 최고의 화제작으로 기록됐다. 극 중 등장한 "당신 부숴버릴거야"라는 대사는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될 만큼 명대사로 남아있고, 그 해 심은하는 SBS 연기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1988년 방송 된 MBC <내일 잊으리> 역시 <청춘의 덫> 못지않은 인기를 모은 복수극이다. 당시 MBC 최고의 흥행 PD였던 박철이 연출을 맡고, 히트 작가 박정란이 의기투합해 만든 이 작품은 당시 스물 두 살의 여배우 김희애를 최고의 톱스타로 만든 드라마기도 하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에게 배신당한 한 여자의 처절한 복수를 그린 <내일 잊으리>는 남자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로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채시라의 파격적인 섹시 댄스로 충격을 안긴 1994년 MBC <아들의 여자> 또한 기억에 남는 복수극이다. 아버지를 죽인 여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유혹해 집안을 파멸로 이끈다는 내용의 이 작품은 반인륜적이고 선정적이라는 날선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시청률 49.7%를 기록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채시라는 이 작품으로 1995년 MBC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 접어들면서 '복수극의 여왕'으로 등장한 배우는 장서희다. 2002년 MBC 일일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된 장서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은아리영 캐릭터를 실감나게 표현하며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받는데 성공했다. 20년 무명생활을 이 작품 하나로 털어버린 장서희는 2002년 MBC 연기대상을 비롯해 최우수상, 베스트 커플상 등 무려 5관왕의 주인공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인어아가씨>의 대성공 이 후, 슬럼프를 겪었던 장서희는 2008년 <아내의 유혹>으로 다시 한 번 재기에 성공하며 "장서희가 출연하는 복수극은 모두 성공한다"는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막장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일 드라마로서 놀라운 성공을 거둔 덕분에 장서희는 그 해 SBS 연기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태양의 여자> 이하나, 김지수를 비롯해 단막극 <늪>에서 음울하고 어두운 연기를 펼친 박지영 등이 복수극의 히로인으로 활약한 바 있다.

⑥ 야망의 화신들 : <사랑과 진실> '원미경'부터 <선덕여왕> '고현정'까지

여자에게도 야망이 없을 수 없다. 돈과 명예, 권력을 위해 온 몸을 던진 드라마 속 악녀들이 숱하게 많은 이유다. 1984년 방송 된 MBC 드라마 <사랑과 진실> 속 원미경은 이런 캐릭터의 원조격이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동생이 한 순간의 거짓말로 언니와 운명이 뒤 바뀌면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를 그린 이 작품에서 원미경은 열등감과 허영심에 찌든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해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사랑과 진실>이 선보인 '출생의 비밀'은 이 후 각종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다.

2003년 한류 열풍을 몰고 온 SBS <천국의 계단>의 이휘향 또한 빠질 수 없다. "넌 빠져!" 라는 인상적인 대사가 여전히 귓가에 울릴 정도로 <천국의 계단> 속 이휘향의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했고 서슬 퍼랬다. 김태희의 아역으로 출연했던 박신혜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때리는 장면은 <천국의 계단>을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청자들의 뇌리에 각인 돼 있다.

 야망 있는 악녀 캐릭터를 연기했던 정애리-원미경-이휘향-고현정-견미리 (시계 방향)

야망 있는 악녀 캐릭터를 연기했던 정애리-원미경-이휘향-고현정-견미리 (시계 방향) ⓒ 각 방송사

<천국의 계단>과 함께 한류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한 MBC <대장금>의 '최상궁' 견미리도 이휘향 못지않다. 2003년 방송 돼 5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대장금>은 이영애의 드라마였던 동시에 견미리의 드라마이기도 했다.

수라간 최고 상궁 자리를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합, 각종 권모술수와 배신, 비참한 최후에 이르기까지 견미리가 연기한 최상궁 캐릭터는 극적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며 드라마의 인기를 견인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장금이의 반대편에서 무한 활약을 펼쳤던 최상궁이 없었더라면 아마 <대장금>은 심심하고 밋밋한 드라마로 남았을 것이다.

<대장금>을 집필한 김영현 작가의 2009년 작 MBC <선덕여왕>의 '미실'도 기억에 남는 캐릭터다.

악녀와 여걸의 경계에 <선덕여왕>의 실질적 주인공이기도 했던 미실은 고현정의 뛰어난 연기력에 힘입어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캐릭터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람은 실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사람은 그럴 수 없어""이게 다 너 때문이다""하늘의 뜻이 조금 필요합니다" 등 미실이 쏟아낸 각종 명대사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 드라마를 통해 고현정은 2009년 MBC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선덕여왕>과 같은 해 방송 된 SBS <찬란한 유산>에도 주목할 만한 악녀 캐릭터가 있다. 바로 배우 김미숙이 데뷔 이래 최초로 연기한 악역인 '백성희' 캐릭터다. 남편이 죽자마자 양딸과 아들을 내쫓고, 보험금을 가로채는 것으로도 모자라 친딸 문채원을 위해 주인공 한효주를 끊임없이 궁지로 내모는 악독한 계모로 분했던 김미숙은 "이제 다시는 악역을 맡고 싶지 않다"는 소회를 밝힐 만큼 열정을 다한 연기를 선보여 큰 찬사를 받았다.

⑦ 사랑의 집착녀들 : <신데렐라> '황신혜'부터 <불새> '정혜영'까지

90년대 트렌디 드라마의 특징은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의 대립구도가 매우 뚜렷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 나쁜 여자가 착한 여자를 괴롭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 사이의 남자 때문이다. 1997년 방송 된 MBC <신데렐라>의 황신혜나 1998년 작 SBS <미스터 큐>의 송윤아, 1999년 작 SBS <토마토>의 김지영이 모두 이런 케이스였다. 이런 극단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들 드라마의 시청률은 40~50%를 상회할 정도로 매우 좋았다.

2000년대 초반에도 이런 설정의 트렌디 드라마들은 대거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가 2000년 MBC에서 방송 된 <진실>이다. 주인공 최지우를 괴롭히는 나쁜 여자로 출연했던 박선영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한 악녀로 변신해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 시청자들을 TV 앞에 붙잡아 놓는 수완을 발휘했다. 박선영의 연기 인생은 <진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큼 이 드라마는 '배우 박선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태양의 여자><적도의 남자>의 김인영 작가와 <찬란한 유산><내 딸 서영이>의 소현경 작가의 초기작이기도 하다.

<진실>과 같은 해 방송한 MBC <이브의 모든 것>의 김소연은 커리어우먼의 전문성과 당당함을 덧입혀 새로운 악녀 캐릭터를 창출한 케이스다. 극 중 아나운서로 출연했던 김소연은 실제 아나운서 못지않은 리포팅 실력으로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재밌는 것은 당시 김소연이 스무살을 갓 넘긴 어린 여배우였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자신만만한 악녀 연기를 통해 성인 연기자로 훌륭한 신고식을 치룰 수 있었다.

2004년 방송 된 MBC <불새>의 정혜영은 '사랑 집착녀'의 완결판이다. "뭐 타는 냄새 안나요? 여기 내 마음이 불타고 있잖아요"라는 대사로 유명한 이 작품에서 정혜영은 사랑하는 남자에게 무섭도록 집착하는 악녀로 등장해 시청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그녀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유리 조각 위를 걷는 장면은 <불새>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다. 사랑과 욕망에 누구보다 충실했던 정혜영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불새>는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드라마다.

한국 드라마 55년 역사를 빛낸 '악녀열전'

이처럼 수많은 악녀 캐릭터들은 한국 드라마 55년 사를 빛내며 시청자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들의 존재는 극에 긴장감을 불어 넣으며 작품의 인기를 견인했고, 숱한 화제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며 시청자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지금껏 다양한 악녀들을 연기하고 만들어 낸 모든 이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며, 그들이 또 어떤 새로운 악녀를 탄생시킬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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