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속 김고은 극중에서 김고은은 순수할 것만 같은 17세 여고생 은교 역을 맡았다. 70대 노인 이적요(박해일 분)와 그의 제자 서지우(김무열 분)의 욕망을 불타오르게 한다.

▲ <은교> 속 김고은 극중에서 김고은은 순수할 것만 같은 17세 여고생 은교 역을 맡았다. 70대 노인 이적요(박해일 분)와 그의 제자 서지우(김무열 분)의 욕망을 불타오르게 한다. ⓒ 롯데시네마


 박범신의 '갈망 3부작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 <은교>.

박범신의 '갈망 3부작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한다는 평가를 받는 소설 <은교>. ⓒ 문학동네

"박범신 소설가님! 노욕이에요! 노욕...!"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소설가 박범신의 글이 참 좋았다. 그래서 박범신의 수필을 읽었다. 역시 참 좋았다. 그 불꽃같은 작가도 나이가 드니 거울 앞에선 국화처럼 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 <은교>도 읽었다. 이른바 '갈망 3부작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읽고 웃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 말했다. "박범신 소설가님! 노욕이에요!"라고 말이다.

소설 <은교>에 관한 이 같은 잔상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영화 <은교>를 봤다. 영화보다 걸쩍지근하고 지질했지만 소설 <은교>를 읽고 '노욕이에요!'라고 내던진 '갈망'이 더 솔직했었다고 생각했다.

'갈망 3부작' 중 하나인 소설 <은교>는 고난의 세월을 인고하며 살아온 70대 국민 시인 이적요의 번뇌 일기다.

소설 속 노시인 이적요는 '적요(寂寥)'라는 필명처럼 세상과 거리를 두며 경건하기까지 한 자신의 시 세계와 이에 못지않은 청청한 삶을 일궈온 시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롯이 시만을 쓰는 문학 세계 그 이면에는 제자 서지우를 통해 통속 소설을 발표하고, 반닫이 안에 발표하지 못한 단편 소설을 쟁여놓은 세속적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문학적 갈망을 참지 못하고 잡문을 써대듯, 이적요는 어느 날 등장한 17세 은교에 빠져든다. 이후 노시인의 모습은, 박범신이 자신의 소설 속에 그려 온 남성들과 마찬가지다. 인간보다 욕망이 똬리를 틀고 있는 수컷이다. 그래서 소설 속 이적요는 은교를 만나면 만날수록 자신의 늙음을 깨닫게 된다. '늙음'에 저항하며 몸부림치고 이 때문에 자기궤멸 속에 허우적거리다 결국 제자 서지우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것은 소설 <은교> 속의 이야기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영화 <은교>의 한 장면. ⓒ 정지우필름


박해일과 김고은 순수한 이미지 덕에 '사랑의 빛깔'을 지닌 영화 <은교>

하지만 영화 <은교>는 조금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해를 맞고 잠에 빠져든 은교를 훔쳐보고, 은교의 무릎을 통한 몽롱한 회춘... 결국, 알몸이 되어 조우하지만 영화 속 이적요의 모습은 욕망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들어서도 어쩔 수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랑'의 빛깔을 지니고 있다. 영화 후반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를 지켜본 후 절망 속에서 빠져든 그가 선택한 '죄'에 대한 변명 혹은 어쩔 수 없는 그 어떤 이유가 된다.

영화 초반 알몸이 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적요를 카메라는 지켜봤음에도 이 영화가 욕망보다 사랑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70대 분장을 해도 해맑게 보이는 박해일(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영화 <연애의 목적>처럼 파렴치한 성추행범으로 나와도 순수해 보이는 모습의)과 그 상대역 은교가 가진 티 없이 순수한 맑음도 그 이유다.

아마 이것은 감독도 의도했던 것으로 판단한다. 소설 속 은교는 고등학생임에도 제법 놀아본 뽄새와 소녀의 순수함을 지닌 묘한 매력의 소녀였다. 이에 비해 영화 속 은교는 알몸으로 돌아다니든, 정사를 나누든 그 순수의 이미지가 전혀 손상 받지 않을 것 같은 시원의 처녀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자와 스승이면서 애증의 두 사람.

제자와 스승이면서 애증의 두 사람. ⓒ 정지우필름


남자의 욕망에 대한 딜레마를 사랑에 빠지는 순수한 감정으로 치환

소설 속에서는 이적요와 서지우, 서지우와 은교 그리고 이적요과 은교라는 관계가 묘한 긴장을 불러일으키지만,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사족으로 돌린 채 이적요의 '홀림'(?)에 집중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이적요라는 나이 든 남자의 욕망에 대한 딜레마가 나이가 들었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수한 감정으로 치환되어 관객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한다. 게다가 연리목에 의해 빚어지는 고상하면서도 정갈하고 그러면서도 극적인 클래식풍의 영화음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은교의 '멜로드라마'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소설 <은교>를 읽으며 웃게 된 결정적 장면은 젊은 여자에 대한 욕망에 갈등하고 번민하다가 결국 제자도 죽음에 빠뜨리고 자신마저도 파멸한 뒤 뒤늦게 남겨진 그의 글을 본 은교가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그녀와 한번 자보고 싶어 몸부림치다가 온갖 사고를 치고 자멸해버린 시인의 글을 보고 은교는 이깟 자신과 자는 게 무슨 대수냐며 오열해 준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노욕 탓에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넣는 노 시인에게 뒤늦지만 들려준 은교의 오열은 '보너스'같았고 번민과 자기 합리화의 줄타기를 아슬아슬하게 이끌어가던 작가가 너무나 후딱 합리화로 끝맺은 것 같아 씁쓸한 뒷맛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한 술 더 뜬다. 대사로는 서지우가 이적요에 대한 감정이 묘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서지우를 파렴치범 이상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그의 죽음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운 이적요를 대학생이 된 듯한 은교와의 재회를 통해 '사랑의 완성'쯤으로 끝을 맺는다. 이 부분에서 이적요 시인의 갈망은 외사랑은 은교의 맞고백에 힘입어 완성되고 노인의 사랑은 판타지가 되는 것이다.

 이적요의 서재를 정돈하는 은교.

이적요의 서재를 정돈하는 은교. ⓒ 정지우필름


노욕의 갈망을 판타지로 버무린 영화 <은교>의 아쉬움

소설은, 마지막에 욕망에 면죄부를 주더니, 영화는 한 술 더 떠 판타지를 남겼다. 우리 대중문화의 고향이 판타지가 아니냐고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소설이 이적요의 죽음만으로도 충분히 그의 늦은 나이에 갈망에 빠진 번민과 혼돈을 이해하려고 애쓰게 했고, 영화 역시 구석 자리에 누운 이적요의 모습만으로도 그의 혼돈과 슬픔을 적나라하게 전달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박범신이, 그리고 정지우 감독이 말하려는 것을 넉넉히 알아들을 수 있음에도 왜 뜬금없이 '사랑의 완성'을 굳이 덧붙여야 했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노년에 찾아온 사랑과 갈망에 대해 고찰해보려던 독자와 관객은 당황스러울 뿐이다. (애초에 이런 소설, 영화를 통해 고찰을 해보려는 자체가 느닷없는 일이지 않느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이가 들어서 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더구나 이젠 나이가 들어서도 다들 너무 쌩쌩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몸도 뜨겁고, 마음도 뜨거운 이 난감한 상황을 영화로 그려낸 건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를 통해 뿌려지는 완성된 사랑의 판타지는 부자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판타지만큼이나 위험하지 않을까?

갈망하는 것과 갈망을 합리화하는 것, 그리고 갈망에 대한 보상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당신들도 다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부추기지 않는 좀 더 솔직한 작품을 원하다.

은교 박해일 박범신 김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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