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 신모 기자가 내게 이 영화를 추천했다. 원래 ‘낭만파 가을’ 어쩌고 할 기사에 쓰려고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볼만한 근사한 영화 하나 추천” 하랬더니, 대뜸 이 영화 제목을 들이댔다. 안 그래도 나쁜 내 귀는 살짝 경련을 일으키며 영화 제목을 입수하지 못했다.

“<로스트 라이온즈>요.” 그가 다시 또박또박 말했고, 난 어리버리 생각했다. ‘라이온즈? 야구 영화인가?’ 그리고 생각은 매끈하게 이어졌다. '어? 미국에도 ‘라이온즈’란 야구팀이?' 다행히도 전화 너머 그는 ‘정치영화’라고 말했고, “정치 영화요?”라는 내 말에서 ‘낭만적인 가을과 함께 즐길 영화를 추천해 달랬잖아요?’란 힐난과 떡 씹은 듯한 말투를 느꼈는지, 그는 얼른 다른 영화를 추천하는 센스를 발휘했다.

 영화 <로스트 라이언즈> 포스터.

영화 <로스트 라이언즈> 포스터. ⓒ 20세기폭스


그런데 '정치'의 '정'자라면, 정내미 줄줄줄 떨어뜨리며 얼른 내빼는 민첩성을 발휘하는 내가 어쩌다 이런 '정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을까?

"과연 어떤 ‘정치영화’길래? 그렇게 대단하대?"라고 물으신다면, 민망하다. 실은 “톰 크루즈, 메릴 스트립, 로버트 레드포드가 나오고 로버트 레드포드가 감독한 영화예요”라고 그가 살짝 날린 낚시줄에 내 호기심이 어느새 대롱대롱 매달려 해롱댔기 때문이다.

신기하지 않을 리 없다. 정치 영화에 톰 크루즈라니? 영화에서 폼 잡기 좋아하고, 사이언톨로지라는 요상한 종교에 심취한 그 분이 어인 일로 이런 영화에 납시셨을까?

거기다 '프라다를 입으시는 악마' 이전부터 '악마 같은 연기'로 나름 내게 짜릿한 흥분을 안겨주시는데 실망이 없으시던 메릴 스트립이라니. 물론 요즘 살짝 손 댔다가 살짝 요상해진 얼굴이 돼버린 로버트 레드포드의 들러붙은 눈이 신경 쓰였지만, 그 신경을 호기심이 이겼다. 그리고 봤다. 으윽. 살점이 나달나달 헤집어져 드러난 무릎 뼈를! 오 마이 갓.

멍청한 양이 용감한 사자를 갖고 노네?

<로스트 라이언즈>로 바뀐 이 영화의 원제는 ‘Lions for Lambs'다. '양이 이끄는 사자들'이란다.  웃기다. 사자 치는 양이라니?  이 말엔 어원 혹은 '스토리'가 있다고 했다. 1차 대전 때다. 독일군 장교가 영국군을 가리켜 그러셨단다. "영국군은 양이 사자를 이끌고 있다. 어리석은 양 때문에 용감한 사자들이 희생당한다." 오죽 보기 답답하면 적군인 독일군이 그런 말을 했을까?

이걸 영화 제목으로 쓴 이유? 물론 어떤 '멍청이'도 금방 눈치 챌 수 있게, 지금 미국이 그렇단 이야기다. 6년째 이라크 전을 치르는 지금 미국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왜 이 제목을 썼겠나? 그런데 남 이야기 같지 않다. 우리도 TV만 켜면, 뇌가 양털로 꽉 찬 양들이 "메…"하고 떠들어대는데 뭘.

야심찬 데다 승승장구하는 상원의원 어빙(톰 크루즈)이 웬 일로 단독 인터뷰라며 베테랑 기자 재닌(메릴 스트립)을 부른다. 그것도 한 시간이나 시간을 주겠단다. 이 정도면 특대우 가운데 특대우다. 뭔가 '냄새'를 맡은 재닌에게 아니나 다를까. 어빙은 6년째 지지부진한 전쟁으로 욕 먹는 이라크전을 살릴 묘안이 있다며 '전진 포인트' 어쩌구를 읊어댄다. 말은 그럴싸한데, 실은 단순하다. 아프가니스탄을 새로 공격하시겠단다. 새로운 전략이라며.

황당해 하는 재닌에게 어빙은 말한다.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행동할 때예요. 전략을 바꾸면 이겨요." 그럼 파병을 더 해야 할테고, 징병이 필요하지 않냐는 노련한 질문에 노련한 상원의원 어빙은 역시 노련한 정치가답게 빙빙 돌려 말한다. "어떤 대가든 감수해야죠."

그래 놓고, 재닌이 과거에 그를 '공화당의 미래' 어쩌구 하며 치켜 세운 기사에 대한 보답이란 식으로, 재닌에게만 주는 특종이라며 생색은 다 낸다. 그러면서 대통령 후보로 안 나갈 거라고 되레 강조한다. 느낌이 안 좋은 재닌은 확신한다. 이건 '선물'이 아니라, '선전'이야. 언론을 이용해 대통령이 되겠다는 작전이야.

 영화 <로스트 라이언즈>에서 톸 크루즈는 전도 유망한 공화당 상원의원 어빙으로 분했다.

영화 <로스트 라이언즈>에서 톸 크루즈는 전도 유망한 공화당 상원의원 어빙으로 분했다. ⓒ 20세기폭스


다른 쪽에선 대학에서 정치과학을 가르치는 말리 교수(로버트 레드포드)가 만날 결석하는 학생 토드와 면담 중이다. 그는 현 정치와 사회에 진저리 치는 토드에게, 자신이 아끼던 노력파 제자 둘이 어떻게 이라크 전에 지원해 참전했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한다. "장래성이나 잠재력은 쉽게 변해. 언제 사라질지 몰라."

날카롭던 시각을 버리고 연애다 뭐다 하며 세상을 냉소하는 토드와 말리 교수는 언쟁을 벌인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데요? 논쟁하느라 바쁜 이들과 다른 한쪽에선,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이 파견된다. 적군이 없다던 곳에 간 헬기는 격추 당하고, 미군 두 명은 고립된다. 그 둘은? 빈민지역에서 미친 듯이 공부해 장학금 받아 말리 교수가 있는 대학에 입학했던 이들이다.

정치와 언론에 대해 묻다. 뭘?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패를 내보인다. 허무맹랑한 '사실'이 뜬다. 2003년 시작한 이라크 전에서 미군 3천여 명이 죽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금방 다 쓸어버리고 끝낼 것처럼 호들갑으로 시작한 전쟁은 아직도 6년째 이어지고 있다. 왜? 언론은 뭐하는 건데? 지금 미국은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사람들은 왜 정치에 무관심한대? 이라크 전에서 죽는 이들은 누구인데?

40년차 베테랑 저널리스트인 재닌을 연기하는 메릴 스트립의 미묘한 표정은 불안한 현실을 안겨준다. "어떤 대가든 감수한다." 정치인들은 이 말을 좋아하고, 그 대가는 다른 이들이 치른다. 그 대가는 가혹하다. 돌릴 수 없게 가혹하다.

나이를 자셔서 그런가? 일곱 번째 연출작인 이 영화에서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은 흥분하지 않았다. 영화가 뭐 대단히 통렬하진 않지만, 때론 아직도 떠도는 순진함에 허허롭게 웃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도 없다. 우리가 지금 '언론'과 사이좋은 '정치'를 실감나게 보고 있어서일까?

기업에 팔린 방송국은 '팔리는 방송'을 내보내느라 바쁘다. 어느 연예인이 이혼하고, 왜 이혼하는지를 '보도'하느라 바쁜 방송과 그런 방송에 넋을 잃느라 바쁜 이들을 보노라니, 왜 피식 웃음이 날까? 우리나라도 미디어가 꽤 발달해서 이제 미국에 지지 않는단 자부심에? '알 권리'라며 여자 스타들 가슴 굴곡 파헤치기 바쁘거나 정치인들 홍보 담당자 노릇하느라 바쁜 '언론'에 대한 얄미운 '시선'이 이 영화엔 있다.

루즈벨트는 말했다. “정의와 평화 가운데 선택하라면, 난 정의를 선택하겠다.” 말 참 근사하다. 정치인답게 ‘뽀대’ 난다. 영화 속에 이 말이 의미심장 하게 등장한다. 상원의원 어빙은 이 말을 액자에 고이 모셔 벽에 붙어 놓았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고, 울 엄마 말 한 마디에 훌쩍이던 시절의 나 같으면 이 말에 ‘감동’ 살짝 먹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었다. 본 것도 많다. 저런 말 하는 인간치고 ‘정의’로운 인간 못 봤다. 그러니까 루즈벨트 나으리가 하신 말이 그거 아닌가?  평화보다 전쟁, 난 선택만 하고 나가진 않는다. 왜? 지도자니까.

좋겠다. 돈 많고 입만 산 당신들은 ‘전쟁’ 은커녕 '군대'도 안 가고, 자식도 대대로 안 보내고, 근사하게 쫙 빼입은 채 온갖 근사한 말만 주워삼킬 수 있어서. 전에 누군가 그랬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선의’ 뿐일까?

이 영화에 '선의'가 없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졸음'도 없다. 배가 좀 나와서 그렇지, 톰 크루즈는 아직도 눈에서 광선을 발사할 줄 안다.

 영화 <로스트 라이언즈>.

영화 <로스트 라이언즈>. ⓒ 20세기 폭스


덧붙이는 글 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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