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대표하는 세 사람을 꼽는다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각론이 있고 반론이 있을 테지만 고르기 힘든 일만은 사실이다. 대형화원에서 꽃봉오리만 가린 채 줄기만 보고 그 중 하나를 고르는 일처럼 즐겁지만 곤혹스런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쿠바'하면 떠오르는 것이 세 사람이 있으니, 그 중 먼저가 체 게바라(Che Guevara)이며 그리고 아투로 산도발(Arturo Sandoval) 마지막으로 라파엘 팔메이로(Rafael Palmeiro)가 그들이다. 체 게바라, 아투로 산도발 그리고 라파엘 팔메이로이들은 일란성 쌍둥이의 미소처럼 동일한 삶의 궤적을 보이기도 했으며, 그들이 선택한 배우자가 모두 다르릇 서로 판이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체 게바라는 혁명의 전도사였으며 아투로 산도발은 재즈의 전도사였고 라파엘 팔메이로는 야구의 전도사였다. 체 게바라는 혁명을 위해 그의 고국 아르헨티나를 떠났으나 아투로 산도발과 라파엘 팔메이로는 음악과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들의 고향 쿠바를 등져야했다. 그들은 전도사로서의 인생을 살았으나 그들이 밟고 있는 지면은 모두 외지에 불과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복음은 언제나 외로운 것이었다. 그들의 삶의 궤적이 여기까지만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체 게베라는 쿠바혁명 이후 시대를 대표하는 양심이자 행동의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아투로 산도발은 재즈 트럼펫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라파엘 팔메이로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우아한 슬러거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일치는 여기까지였다.체 게바라는 볼리비아의 정글에서 정부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죽음은 차라리 생체적인 정지에 불과할 뿐 영원한 자유와 복음의 송가로 남게 되었다. 아투로 산도발은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트럼펫이 얼마나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고 그런 그를 사람들은 최고의 재즈 트럼펫터라고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음악교수를 역임하며 행복하게 트럼펫 연주를 하고 있다.그러나 라파엘 팔메이로, 그는 앞선 게바라와 산도발보다 부유하고 명성 또한 뒤질 것이 없는 삶을 살았지만 그는 혁명의 상징도 최고의 재즈 트럼펫터도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명예의 전당 회원은 더욱 더 아닌 그저 '약물복용자'로 낙인 받을 분위기다. 이들의 시작과 삶의 가장 화려했던 부분은 일치하였으되 최후는 라파엘 팔메이로만이 다른 길에 몰려 있는 것이다.역사상 가장 우아하고 자연스런 스윙피터 게몬스가 "역사상 가장 우아하며 고상한 스윙을 지닌 그라운드의 지배자"라 불렀던 사나이. 일본의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가 "마치 유능한 사무라이가 대나무를 가르는 듯 자연스럽고 매끈한 타격자세"라며 감탄해마지 많았던 바로 그 사나이.메이저리그 사상 역대 26번째로 통산 3천 안타를 기록하고 역사상 네 번째로 3천안타와 500홈런을 동시에 이룬 슬러거. 전대미문의 9년 연속 38홈런과 100타점 이상을 동시에 기록한 사나이. 90년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출장기록을 남기며 꾸준함과 성실함의 대명사로 인정받았던 선수. 무엇보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듯 자신의 기록보단 '자선'을 강조하고 어린이를 위한 많은 '기부'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그리하여 로베르토 클레멘트상을 받기도 했던 두 아이의 아버지. 기자들과 팬들에게 친절하였고 모범적인 시민으로 칭송받았던 바로 그의 이름은 라파엘 팔메이로.그러나 이제 그를 가리켜 서두에 기록해두었던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그는 스테로이드계 금지약물인 스타노졸롤을 복용한 약물복용자일 뿐이며, 신성해야 할 의회에서 위증을 일삼은 용의자이며, 자신의 약물복용을 팀동료에게 책임전가시키려던 악당에 불과하다. 그를 가리켜 '희대의 바보'란 비아냥은 오히려 사려 깊은 것. 그가 꿈꿔왔던 명예의 전당도 무엇보다 두 아들에게 훌륭한 아버지로 남고자 했던 그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아마도 그는 지금쯤 마이애미의 석양이 드리워진 허름한 가옥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집 뒤뜰의 작은 야구장에 상상의 시선을 두고 있으리라. 지금 그는 눈을 감고 아버지와 함께 야구공을 주고 받던 그 따뜻하고 상냥했던 추억으로 서서히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라파엘 팔메이로 그 역사의 시작
 라파엘 팔메이로 개인 홈페이지 화면

1964년 9월 24일 쿠바 아바나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Rafael Corrales Palmeiro'.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라피'란 애칭을 달아주었다. 그의 아버지 호세 팔메이로(Jose Palmeiro)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아마추어 야구선수였다. 언제나 테이블 위에서 식사를 할 만큼 유복한 가정을 꾸린데다 꽤 괜찮은 스윙을 보여준 그였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그들 가족의 미래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가 다스리는 쿠바의 공산주의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라고 단언했다. 결국 어린 라피를 비롯한 3형제와 아내를 데리고 미국 마이애미로 이주한다. 무일푼으로 도착한 노스 마이애미에서 그는 건설노동자로 취직한다. 그러나, 한동안 이민생활의 외로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이애미 해변가의 서핑에 그는 도저히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어느 날, 그는 야구글러브 두 개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집 뒤뜰에 아주 작은 야구장을 만들고는 어린 라피를 불렀다."아버지가 네게 공을 던지면 넌 이 굵고 커다란 장갑으로 받는 거야."라피가 7살 때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아버지 호세는 아들에게 캐치볼과 스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그때 아버지의 스윙과 지금의 제 스윙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훗날 라피는 그렇게 고백했다.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고상하고 우아한 자세라 불리는 라파엘 팔메이로의 스윙은 바로 그의 아버지 호세의 못다한 꿈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로베르토 클레멘트를 꿈꾸던 히스패닉 소년아버지와 라피가 자주 찾던 곳은 로베르토 클레멘트 공원(Roberto Clemente Park). 로베르토 클레멘트는 당시 모든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우상이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자 지역사회봉사에 열심이었던 인도주의자로 유명한 이 푸에토리코 출신의 젊은 야구선수는 경기장 밖에서도 항상 모범적인 생활을 해왔는데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 수많은 미국인들은 라틴아메리카 이민자에 대한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정도였다.그러나, 그는 1972년 연말 니카라과의 지진 소식을 듣고 12월 31일 구호물자를 싣고 가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살아서는 훌륭한 선수였고 죽어서는 성인이 된 유일한 야구선수였던 로베르토 클레멘트. 라피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딴 공원에서 아버지와 캐치볼을 주고 받으며 자랐던 것이다."로베르토 클레멘트는 제겐 우상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선 이렇게 말씀해주곤 했습니다. 로베르토 클레멘트처럼 훌륭한 선수가 되기 이전에 그와 같이 훌륭한 시민이 되어라."진심으로 원하면 결국 이루어진다고 했는가. 훗날 라피는 그의 유년 시절 소망대로 로베르토 클레멘트의 기록을 능가하는 대선수가 되었으며 그의 선행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로베리트 클레멘트상의 수상자가 되었다.라피는 유년 시절부터 야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가 12살이었을 때 그는 그보다 서너 살 많은 선수들과 플레이를 함께 했으며 거기에 멈추지 않고 그들보다 월등히 높은 기록을 보여주었다. 아버지 호세의 공이 컸다."아버지는 항상 저를 더 높은 수준에 끌어올리고자 노력했습니다."그때 처음으로 라피는 드디어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되었다. "I wanted to be a ballplayer", 바로 그것이었다. 메이저리그인가? 대학인가? 갈등의 기로마이매미의 잭슨시니어 고등학교(Jackson Senior High School)에서도 유능한 선수였던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과 대학입학이란 갈림길에 마주치게 된다. 그는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여 당장이라도 그의 우아한 스윙을 선보이고 싶었지만 그의 가족은 오히려 대학행을 권유한다. 아직 그들은 미국 주류사회의 주인공이 아닌 히스패닉 이민자 가정에 불과했고, 불확실한 메이저리거로의 성공보단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이 미국사회에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또한 지금의 야구가 라피의 미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란 우려를 그의 아버지 호세를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었다.라피는 결국 미시시피 주립대학(Mississippi State University)에 입학한다. 그리고 입학 첫 해 아마추어 미국대표로 뽑힌다. 그러나, 그의 화려한 이력은 잠시 여기에서 멈춘다. 그의 고상하고 우아한 스윙은 1985년 드래프트 1순위(전체 22위)에 그의 이름을 올려놓았지만 그것은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다. 시카고 컵스(Chicago Cubs)와 계약한 후 그는 별다른 활약없이 87년까지 평범한 선수로 벤치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게다가 그는 수비 위치조차 1루와 외야수를 넘나들며 자리를 못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물 두 살의 애송이에 불과한 그에게 너무 큰 기대를 했던 탓일까? 뛰어난 재능과 준비된 역량이 있음에도 팀의 주축이 되지 못하는 라피. 그러니까 그는 하얀 벽에 박혀 있는 못과 같은 존재였다.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 되다그러나 다음 해 152경기에 출전하여 타율.307를 기록한 라피는 비로소 그의 스윙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팀을 만나게 된다. 바로 텍사스 레인저스(Texas Rangers). 당시 텍사스는 주전 1루수 피트 오브라이언(Pete O'Brien)의 공백을 커버하기 위해 시카고로부터 라피를 요구했고 이것이 양팀간 6:3 대형트레이드로 이어진 것.텍사스로 트레이드 된 라피는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그의 위치를 확고히 인정받기 시작한다. "텍사스는 제겐 행운이었습니다. 아마도 시카고에 남아있었다면 저는 마크 그레이스와 혼신을 다해 싸우다 기진맥진해 있었을 것입니다."신은 90년대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1루수 겸 좌타자의 경합을 지켜보기보단 이들의 운명을 갈라놓는데 도박을 하였고 이 도박은 적중하였다. 그러나, 텍사스로 이적한 라피는 훗날 트레이드 마크가 될 홈런에서는 아직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상태였다. 90년 3할 이상의 타율은 기록하지만 홈런수는 14개. "켄 그리피 주니어(Ken Griffeys Jr)와 마크 맥과이어(Mark McGwires)가 멋진 타격을 보여준 것은 그들의 좋은 신체조건이 아니라 확고부동한 정신력때문입니다. 당시는 매우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했던 시기였습니다." 라피는 스스로의 정신력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것은 이듬해 .322 홈런 26개라는 좋은 성적으로 만개한다. 93년 타율 .295와 홈런 37개 그리고 처음으로 100타점 이상(105)을 기록하고 이때부터 기자들과 팬들은 라피를 '슬러거(Slugger)'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라피는 드디어 FA자격으로 다음 해 94년 볼티모어 오리올스(Baltimore Orioles)와 장기계약을 맺는다. 볼티모어는 기회의 땅이 될 것인가"볼티모어는 늘 뛰고 싶던 팀이었습니다. 칼립켄주니어(Cal Ripken Jr)에게서 배울 수 있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도 있는 기회니까요."입단을 하며 라피는 그렇게 겸손하게 소회를 표명했지만 정작 볼티모어는 그로부터 새로운 정신력과 기술을 배우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는 듯 했다.

덧붙이는 글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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