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우리는 10개를 넘는 은메달을 따냈다. 당초 10개가 넘는 금메달을 목표로 한 아테네 올림픽이었지만 금메달은 9개에 그쳤고 은메달은 12개나 따낸 것이다.

이렇듯 기대했던 금메달 대신 은메달이 쏟아져 나오자 몇몇 사람들은 "저 중에 반이라도 금메달이 되었으면…"하고 말들을 한다. 특히 사격의 진종오 선수, 역도의 장미란 선수, 배드민턴의 손승모 선수, 유도의 장성호 선수, 핸드볼 여자 대표팀 등이 딴 은메달들에 대해 더욱 아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사람들의 바람처럼 그렇게 되어 10개가 훨씬 넘는 금메달을 획득하고 대한민국의 저력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면서 지금보다 훨씬 뜨거운 자축의 분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금메달이 아니면 어떤가? 우린 은메달과 동메달도 금메달처럼 충분히 기뻐할 수는 없을까? 나는 지금부터 4년 전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았던 남자 펜싱 경기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남자 플뢰레 부문 결승에 올랐던 우리 나라의 김영호 선수는 쟁쟁한 세계의 강호들을 모두 물리치고 한국 펜싱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다. 그 때 김영호 선수가 따낸 금메달은 정말 그의 오랜 피땀으로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금메달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때의 펜싱 경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김영호 선수 때문이 아니다. 바로 김영호 선수와 결승전을 벌여 15:14로 아깝게 패하며 은메달에 머물렀던 독일의 랄프 비스도르프 선수 때문이었다.

당시 세계 랭킹 1위로 김영호 선수보다 금메달 획득이 유력시되었던 랄프 비스도르프는 김영호의 선전에 1점 차로 패배하며 은메달을 따냈다. 만약 내가 그 선수였다면 눈앞에 다가왔던 금메달을 놓쳐 버린 기분에 깊은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시상식에서의 랄프 비스도르프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은메달리스트를 소개할 때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당당하게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환하게 웃으며 시상대에 올라서 기뻐하던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잠깐이나마 의아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도 "저 선수가 금메달인가?"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다.

자신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건 김영호 선수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진정한 축하를 보낸 랄프 비스도르프는 은메달을 따 아쉽지 않느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경기는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김영호는 금메달을 딸 자격이 있으며 난 내가 올림픽에서 두 번째로 잘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랄프 비스도르프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의아함이 곧 신선한 충격으로 돌아왔다. 대부분 은메달을 따면 진정 기뻐하기보다는 마치 큰 죄를 지은 듯한 어두운 표정으로 애써 웃음을 지으며 시상식에 올라서는 우리 선수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모두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흔히 은메달을 땄을 때 "은메달을 획득했다"보다는 "은메달에 머물렀다"는 표현들을 자주 쓰거나 아쉽다거나 아깝다, 혹은 그 정도면 잘했다는 표현으로 축하가 아닌 위로를 건네기 마련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이젠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은메달이면 어떤가? 은메달을 따기도 정말 엄청나게 어려운 것이다. 진정으로 축하해 주고 영웅 대접을 해줘도 모자라는 마당에 금메달을 못 땄다고 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은 모 기업이 부르짖던 '일등 주의'에 우리도 모르게 감염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부터가 너무 금메달만 바라본 나머지 아쉬움에 젖어 은메달과 동메달, 혹은 올림픽 참가 자체를 진정 기뻐하고 즐길 더욱 수 많은 기회들을 아깝게 놓쳐 버리는 것 같아 그게 더 아쉽기만 하다.

이제 좀 편안한 마음으로 선수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에 열광하고 은메달과 동메달에도 충분히 기뻐하며 올림픽을 보자. 하지만 아직도 우리는 금메달 하나 하나에 마음 졸이고 안타까워 하며 올림픽을 지켜보기에 은메달을 따고 진정으로 기뻐한 랄프 비스도르프의 웃음이 더욱 인상에 남는다.

이것이 내가 아직도 '랄프 비스도르프의 은메달'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하고, 또 잊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고 싶은 이유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것 역시 기억하자.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가 금메달 9개를 따고도 10위권 안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금메달을 못 따 아쉬워하던 12개 은메달들의 역할도 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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