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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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반전은 이대엽과 옹주(권유리 분)를 뜻밖의 관계로 만들어놓았다. 이 둘은 어릴 때는 서로 사랑했지만, 옹주가 이대엽의 형수가 된 뒤로는 금지된 관계가 됐다. 그 뒤로도 이대엽은 변함없는 마음을 간직했지만, 옹주는 감정을 지워나갔다. 그러다가 옹주는 김대석(바우, 정일우 분)을 만났고,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됐다.
옹주가 이대엽의 형수가 된 뒤부터 둘의 사랑은 금지된 사랑이 됐다. 그런 상태에서 옹주와 이대엽이 사촌 관계로 밝혀졌으니, 이들의 사랑에 대한 금기는 한층 더 촘촘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진짜 아버지가 이이첨이든 임해군이든, 이대엽은 옹주를 합법적으로 사랑할 수 없게 됐다. 이대엽의 혈통에 대한 폭로로 인해 그와 옹주의 관계는 한층 더 특이한 관계가 되었다.
이대엽을 길러준 드라마 속의 이이첨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정을 사실상 자기 뜻대로 이끌어가면서도, 광해군마저 몰아내고자 집권당인 북인당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준비한다.
이대엽은 평소부터 아버지 이이첨의 권력욕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들 이대엽은 이이첨과 다른 삶을 살았다.
그런 이대엽이 쿠데타 음모를 알아내자, 이이첨은 그 앞에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애기씨로 존칭한다. 이이첨은 자신이 애기씨의 친아버지가 아니며 죽은 임해군이 친아버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애기씨는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의 아들이므로 대통을 승계할 적임자라고 치켜세운다. 그런 뒤 자신의 쿠데타 음모에 참여해 왕위에 등극하시라고 간청한다.
이대엽을 치켜세운 이이첨
드라마 속의 이이첨은 이대엽이 임해군의 아들이므로 왕이 될 적임자라고 말했다. 인목왕후(인목대비)와 선조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인 영창대군은 선조가 죽기 2년 전인 1606년에 출생했다. 그에 비해, 임해군은 왕실 족보인 <선원속보>에 따르면 선조가 왕이 되고 5년 뒤인 1572년에 태어났다. 그러고 나서 3년 뒤에 광해군이 출생했다.
임해군은 첫 적자인 영창대군보다 34년 먼저 태어났고 친동생인 광해군보다 3년 먼저 태어났다. 태어난 순서로만 따지면, 임해군이 으뜸이었다.
그래서 적자인 영창대군이 만 8세에 세상을 떠나 후손을 남기지 못했으므로, 출생 순서로만 따지면 임해군의 후손들이 으뜸의 권리를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드라마 속 이이첨이 이대엽을 치켜세우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이해될 만하다.
그런데 왕이 될 수 있느냐가 꼭 혈통에 의해서만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었다. 도덕성 역시 핵심 기준이었다. 도덕성은 왕의 자손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해도, 왕의 자손을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는 있었다. 바로 이 도덕성에서 임해군은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었다.
임해군은 한마디로 망나니였다. 음력으로 선조 39년 8월 23일자(양력 1606년 9월 24일자) <선조실록> 등에 따르면, 그는 일반 백성을 함부로 구타하고 살해했으며 남의 노비와 토지도 멋대로 강탈했다.
같은 해 8월 24일자(양력 9월 25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지방에서 납부하는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일까지 있었다. 왕자가 산적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또 지방 군수가 한양을 방문하면 수행원을 붙잡아두고 군수한테서 재물을 갈취하기까지 했다. 다종다양한 악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위 기록에 따르면, 참다못한 선조가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을 지시하자 백성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눈물을 흘리며 춤을 추웠다고 한다. 임해군에 대한 원성이 얼마나 자자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악행이 있는 데다가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전쟁 수행에도 지장을 초래했다. 이랬기 때문에 장남 지위와 관계없이 일찌감치 후계구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자식들 간의 서열을 매우 중시했다. 31세 된 서자 광해군과 갓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을 저울질한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가 됐던 임해군의 도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