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엠엔엠인터내셔널㈜
<라인>을 연출한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은 2012년 작품 <시스터>를 통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은 1971년생 여성감독이다. 감독은 장편 데뷔작 <홈>에서부터 기구한 상황에 놓인 위태로운 가족을 중핵으로 삼아 매력적인 이야기를 펼쳐왔다. 2008년 선보인 <홈>에선 가족이 살던 집 바로 옆에 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종래의 삶을 위협받게 된 상황에서 이주를 거부하고 집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풍경을 명배우 이자벨 위페르 주연으로 펼쳐보였다. 그리고 <시스터>는 스키 리조트 주위에서 좀도둑질을 해 생계를 잇는 소년과 그런 소년에게 돈을 얻어 생활하는 철부지 누나로 구성된 가족을 내세웠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한 레아 세두가 누나로, 감독이 발굴한 신예 케이시 모테 클레인이 주인공 소년을 맡은 영화를 통해 감독은 벼랑 끝에 놓인 해체 직전의 가족과 그들 사이의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관계를 인상적으로 그린다.
그렇게 통상적인 가족 관계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든 가족 이야기를 선보여온 감독은 (중간에 다큐멘터리와 옴니버스 장편, 텔레비전 영화들을 계속 작업하긴 했지만) 10년 만의 후속작품이자 세 번째 장편인 <라인>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장기인, 평범한 이들에겐 너무나 낯선 형태의 가족모델을 펼친다. 신작의 기본적인 갈등 원인은 원치 않았던 임신으로 20살에 첫 아이를 낳고 싱글 맘으로 살아온 엄마 크리스티나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다. 그는 장래가 창창한 '솔리스트'였지만 마르가레트를 낳고 음악가로서 출세하겠다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에 대한 원망이 어릴 적부터 마르가레트에게 쏟아진 셈이다. 마르가레트는 엄마의 감정 배설을 일평생 과부하 걸리도록 받아온 것이다. 그 결과로 맏딸은 경계선 성격장애와 흡사한 상태에 놓인다. 한없이 여린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극단적 폭력성을 펼치는 것이다. 영화 내내 그런 마르가레트의 위태위태한 상태가 실감나게 묘사된다.
딸을 짐 덩어리처럼 표현하는 엄마와 그 감정 배설의 쓰레기통이 되어버린 탓에 왜곡되고 일그러진 딸이라는 기구한 상황설정은 비슷한 시기에 선보여 국내외 영화제에서 적잖은 반향을 얻었던 김세인 감독의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기본 갈등구도와 겹쳐 보이는 구석이 적지 않다. (마침 두 작품은 나란히 2022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경쟁과 비경쟁부문인 파노라마 초청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영화의 출발은 비슷해보여도 전개 양상과 결말부의 차이는 제법 나는 편이다. 김세인 감독의 영화가 모녀간으로 압축된 갈등이 어설픈 화해와 치유와는 담 쌓은 채 끝까지 치닫는 결말을 선보이는 반면, <라인>은 마리옹과 루이즈라는 가족 일원의 역할과 입장이 추가되면서 보다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 복원 노력과 궤를 같이 하는 방법론을 전개한다. 하지만 두 영화 모두 통속적인 빤한 결론과는 차별화되는 개성을 공히 지향하는 흥미로운 변주에 속한다.
두 영화의 가장 큰 공통점이라면 자식을 무한애정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꿈과 미래를 좌절시킨 원망 대상으로 간주하는 파격적인 어머니 상을 구현하는 구조다. 두 엄마 모두 자식 돌보다 한 평생 다 갔으니 늦게라도 만회하고픈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자기 또래의 어린 남자와 열애를 펼치는 엄마를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거듭 목격하는 마르가레트의 시선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거기에 가족의 가장 시급한 과제인 엄마와 큰언니 간 화해의 장이 되어야 할 크리스마스 찬스를 놓칠세라 초조한 두 딸의 고뇌가 뒤를 잇는다. 누군가는 철없는 엄마 때문에 애정결핍 신세인 딸을 동정할 테고, 다른 누군가는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적 제약을 깊숙이 떠올릴 장면들이 연속된다.
<라인>에서 엄마 vs. 큰딸의 기본 갈등구도와 함께 다른 자매들의 분투는 또 다른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특히 죽은 나무에 싹이 돋아나길 바라는 태도로 엄마와 큰언니의 휴전을 간절히 기원하는 막내 마리옹의 수난이 관객들에겐 진하게 각인될 테다. 마리옹은 12살 나이에 두 철없는 어른들 사이를 오가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이 소녀가 후반부에 펼치는 희생과 헌신은 엉뚱해 보이다가도 심금을 울리는 구도의 연속이다. 여기에 중간에 끼어서 (가족 중 가장 상식인 포지션이기도 한) 갓 출산한 상태에도 중재역을 도맡은 루이즈 또한 수고가 많다.
◆ '선'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으로 돌아보는 가족의 의미
▲"라인" 스틸영화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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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크리스티나는 큰딸 마르가레트를 낳고 돌보느라 예술적 야망을 포기해야 했고 그 한은 평생 이 가족에게 원죄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정작 마르가레트는 그런 엄마의 재능을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크리스티나의 분노가 마르가레트를 향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도입부에서 관객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마르가레트의 폭발과 풀 길 없는 울분을 표출하는 물리적 폭력의 현장은 흔히 그런 장면이 남성 캐릭터에게 주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한 의외인 동시에 캐릭터를 설득력 넘치게 구현하는 마법의 장치다. 반면에 음악적 재능과는 무관한 둘째 루이즈는 엄마와 충돌할 일이 없이 평범하게 성장해 자신의 삶을 가꿔나가는 듯 보이지만 원래 중간에 낀 자녀가 속에 응어리 적지 않은 법이다. 루이즈의 딜레마는 영화 속에서 서서히 발현된다.
막내 마리옹은 기묘한 균형추 역할에 충실하다. 루이즈의 출산으로 엄마 크리스티나는 젊은 할머니가 된다. 그런데 마리옹의 경우 나이로 환산하면 크리스티나의 손녀가 되어도 무방한 수준. 그런 가족 구성 덕에 크리스티나와 마르가레트 사이에서 마리옹은 독특한 위상을 가진다. 특별히 원죄 없이 태어난 셈인 마리옹만이 갈등하는 두 모녀 사이를 오갈 수 있다. 그 때문에 크리스마스라는 (유럽 사회에선 여전히 기독교 전통이 짙은 상황에서) 명절을 전환점으로 삼는 본 작품에서 마리옹의 역할과 묘사는 이채로움 그 자체로 영화 내내 기능한다.
그런 마리옹이 고심 끝에 고생해가며 긋는 100미터 거리측정 선은 얼핏 보면 격리와 단절의 군사분계선으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 분리 덕분에 오히려 수십 년간 해답 없이 치고 박던 모녀간에 머리 식히고 각자를 돌아볼 여지를 남기는 '휴전선' 역할이 아닐까 차츰 생각이 변하게 만든다. 그리고 '선'의 기능과 효능이 촉발한 관계의 정립은 영화의 결말이 던지는 여운과 통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제목처럼 '선'이란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따라 <라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해석과 평가도 달라질 법하다. 이는 또한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신조인, 일부러 보여주지 않음으로 관객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그 과정을 통해 감독이 전하려는 주제를 도출할 수 있다는 믿음과 '선'이 활용되는 역할을 연계시켜보면 의미심장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은 전작에 이어 어정쩡한 봉합 대신에 시련과 고비를 경유해나가며 성장하는 캐릭터들에 방점을 찍는다. 수십 년 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앙금을 다 큰 어른들이 쉽게 고치기란 실로 난망한 일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과거의 상처에 매몰되어 있을 순 없는 법이다. 엄마의 불행을 이해한다면 이제 다 큰 자식은 독자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거기에다 막상 으르렁대고 싸우던 상대와 떨어지니 궁금하고 미안해지는 게 가족의 본성이란 점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작용한다. 인간이라는 종이 탄생한 이후 불변의 천성임을 감독도 부정하진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세상만사 만만치 않다는 슬픈 진실을 진하게 전하면서도, 판도라의 상자 속 마지막 남아 있던 존재인 '희망'을 살짝 남겨주는 찰나가 보는 이들에게 피식 미소 짓게 하는 여유를 선사해주는 영화다.
<작품정보> |
라인 The Line, La ligne
2022|프랑스, 벨기에, 스위스|드라마
2023.01.25. 개봉|103분|15세 관람가
감독 위르실라 메이에
제작 다르덴 형제
주연 스테파니 블렁슈(마르가레트 역),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크리스티나 역)
엘리 스파그놀로(마리옹 역)
출연 인디아 헤어(루이즈 역), 벵자맹 비올레(마르가레트 전 남자친구 역),
달리 벤살라(크리스티나 남자친구 역), 에릭 루프(크리스티나 전 남자친구 역)
수입 및 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공식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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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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