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조선 정신과 의사 유세풍 2>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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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압박은 효종이 죽은 뒤에도 계속됐다. 효종의 새어머니인 장렬왕후 조씨(자의대비)가 상복을 3년복(참최복)으로 입을지 1년복(기년복)으로 입을지가 쟁점이 된 제1차 예송 논쟁 때도 그랬다.
효종이 인조의 장남이라면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하고, 장남이 아니라면 1년복만 입으면 됐다. 이 상황에서 송시열은 자의대비가 1년복만 입도록 함으로써 효종의 위상을 깎아내렸다. 효종에 대한 기득권층의 인식을 상복 문제에까지 반영시켰던 것이다.
효종은 인조의 차남이지만 인조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비운의 세자인 소현세자의 동생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소현세자보다 높았다. 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에서는 왕위계승자인 후사(後嗣)를 지칭하는 사자(嗣子)가 장남인 일남(一男)보다 앞자리에 배치돼 있다. 장남보다 후계자가 더 높게 인식됐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인조의 장남이 아니라는 점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임금이 죽었으므로 관례대로 3년복을 입도록 하면 될 일이었는데도, 굳이 그렇게 효종의 위상을 떨어트렸던 것이다.
송시열은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과 관련해서도 이상한 모습을 보여다.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독살설이 퍼지는데도 이를 적극 규명하기보다는 문제를 덮는 데 주력했다.
효종의 후계자인 현종은 아버지 사망 전날에 갑자기 치료를 중단한 어의 이기선에게 의혹을 품었다. 사망 전날 이기선은 '진맥하는 방법을 모른다'며 치료에서 손을 뗐다. 이전에도 효종을 진맥했던 인물이 엉뚱한 핑계를 대고 책임을 방기했던 것이다.
음력으로 현종 즉위년 6월 3일자(양력 1659년 7월 21일자) <현종실록>에 따르면, 이기선은 수사기관의 심문을 받을 때도 "원래부터 진맥하는 법을 몰랐다"고 진술했다. 사극에서 자주 묘사되듯이, 어의들은 왕후나 후궁의 손목을 잡지 않고도 맥을 짚곤 했다. 손목에 맨 실만 잡고도 환자의 몸 상태를 확인했을 정도다.
원래부터 진맥법을 몰랐다는 황당한 변명에 현종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맥 짚는 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의원이 됐느냐?"며 이기선에게 엄벌을 가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때 이기선을 사지에서 건져낸 사람이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현종의 특명이 있은 지 8일 뒤 창덕궁 양지당에서 현종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기선을 선처해야 할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했다. 이기선처럼 그 역시 엉뚱한 논리를 내세웠다. 현종 즉위년 6월 11일자(1659년 7월 29일자) <현종실록>에 따르면, 송시열은 '이기선은 원래부터 맥을 짚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호소했다. 결정적 순간에 치료를 중단한 이기선을 그런 황당한 논리로써 옹호했던 것이다. 이기선을 선처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상태에서 구명운동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현종은 서인당 지도자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기선을 사지로 내몰지 않을 것이며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효종 독살설과 관련된 의혹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묻혀져갔다.
송시열 벌한 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