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 치명타 드로잉 <임재춘 말씀> 2017, (우) 임재춘 조합원 단식 농성 천막 그림들.
치명타, 전진경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은 예술인들의 창작에 영감을 주고, 예술을 통해 투쟁한 것 같아요. 투쟁이 끝난 이후 기타와 까혼 연주를 들을 수 없어서 더 확신이 갔죠. 아저씨에겐 수많은 예술가, 영화감독, 뮤지션 그리고 문화연대와 함께했던 시간이 어땠나요? 정말 궁금했어요.
그 답을 아저씨의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들을 수 있었죠. 아저씨는 "사실 노동자들이 집회하면 사람들이 '저 사람들 또 도로 막네' 그러지 않나. 그래도 우리 투쟁은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한 평화로운 투쟁, 투쟁의 새로운 방식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며 "기타는 내 인생이었지만, 투쟁은 나를 사회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했었죠. 아저씨의 생각과 마음은 <오마이뉴스>에 연재되어 있는 <
임재춘의 농성일기>에서 읽어볼 수 있더군요.
전 늘 예술가가 사회와 어떻게 관계하고 현장에 어떤 식으로 개입해야 하는지, 노동자가 예술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 왔어요.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느낄 수 있었어요. 아저씨가 말했던 것처럼 노동자들과 함께 새긴 시간의 깊이와 서로에 대한 관심, 그리고 예술을 통해 발언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강한 의지가 예술작업에 투여될 때에 예술가와 노동가, 예술과 노동자가 의미 있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2014년 수라바야 지역에 있는 콜트악기 노조를 만나고 왔었어요. 한국으로 치자면 민주노총 금속연맹 소속의 노동자들이죠. 박영호 사장은 1995년 인도네시아와 1999년 중국 대련에 공장을 지었다고 아저씨들이 알려주셨었죠. 신자유주의의 여느 기업들처럼 값싼 임금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이윤을 챙기려 한 속셈이었어요. 인도네시아 콜트악기 노동자들은 박영호 사장에 대해 현지화에 성공한 것 같다고 말했어요. 박영호 사장은 요 몇 년 사이 인건비가 상승한 중국 공장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재료 수급도 용이하고 가격 경쟁력이 있는 인도네시아 공장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해요.
박영호 회장이 국내 언론을 통해 인도네시아 등 해외공장에서 기타 100만대와 앰프 30만대 생산을 홍보하고 콜트문화재단을 통해 기타를 기부하거나 경연대회를 열어 "소외된 사람들이 기타를 익히고 연주하면서 삶이 풍요로워졌으면 합니다"라고 생색냈었죠. 그러면서 경제 형편이 어려워 노동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걸 익히 알고 있었죠.
그런데도 2018년 예술 행동을 위해 그 공장 앞을 찾았을 때 한국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공장 규모에 깜짝 놀랐었어요. 공장에 갇혀서 밤낮으로 일해야 했던 한국 노동자들의 사정에 비하면 정시 출퇴근 시행과 3교대 무슬림 기도 시간을 보장하는 등 복리후생이 조금 나은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현실은 박영호 사장이 대전 계룡지역 콜텍 노동자들에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어요. 그저 다른 공장보다 임금을 조금 더 주는 정도일 뿐, 여전히 지속고용을 빌미로 노동자가 열악한 상황을 견디도록 통제하고 있었죠. 유기용제 사용과 목재 분진이 가득한 공장에서 천 쪼가리 마스크를 지급하고 있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