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27일 신년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이번 사면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 등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이들은 28일 0시를 기준으로 사면될 예정이다). 물론 거물급 정치인 사면 중심이라 논란도 크다. 법치국가에서 법에 따라 처벌받은 이들을 정치적 이해에 따라 풀어주는 것이 타당하냐는 주장이다. 
 
여기 최고의 정치드라마로 꼽히는 작품이 있다. 공보국을 중심으로 백악관의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 미국 NBC 드라마 <웨스트윙>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특별히 좋아해 참모들에게도 수차례 권하고 청와대에서 시사회까지 열었다는 명작으로, 현존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로 꼽히는 아론 소킨 등이 집필했다.
 
모두 일곱 시즌으로 제작된 이 드라마 가운데 다섯 번째 시즌 열한 번째 에피소드는 오늘의 한국에도 울림이 작지 않다.
 
사면을 둘러싼 논란
 
 <웨스트 윙> 스틸컷
<웨스트 윙> 스틸컷NBC

에피소드의 중심은 사면으로 크리스마스가 낀 주간을 배경으로 한다. 백악관에선 답답한 정국을 사면을 통해 해소해보자는 논의가 급물살을 탄다. 제안자는 대통령과 영부인으로, 특히 대통령 바틀렛(마틴 쉰 분)은 근래 들어 대통령의 사면이 너무 적었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면을 시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편다.
 
드라마는 그가 사면을 찬성하는 논리를 대사로 잡아낸다. 국정연설을 앞두고 논란의 여지를 줄여야 한다는 비서실장 리오(존 스펜서 분)를 불러다 우드로 윌슨이 1년에 344건의 사면을, 캘빈 쿨리지는 326건, 루스벨트 역시 임기 동안 3687건의 사면을 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바틀렛은 "40년 전까진 대통령이 헌법에 명시된 자신들의 권리를 이용해 가혹한 형벌을 누그러뜨린 건 흔한 일이었다"면서 "최근 대통령들은 1년에 40건, 20건, 7건밖에 안 했다"고 지적한다. "법이 엄정해져서 그렇다"는 리오의 말에 "근거도 기록도 남기지 않는 사면절차는 점점 모호해져만 간다"고 반박한다.
 
대통령에게 사면은 형사사법제도의 결함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고 사면의 축소와 불투명성은 그 노력을 태만히 한 결과일 뿐이다. 그에게 사면은 정치가 행하는 관용이며, 법률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결함을 보완하는 조치인 것이다.

트럼프가 되살린 '최소의무형량제'  

드라마에선 근래 강화된 법안 하나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다름 아닌 최소의무형량제(mandatory minimum sentence)로 미국 사회에서도 적잖은 논란이 된 제도다.

한국 법체계에서도 존재하는 양형기준을 법적으로 강제한 개념으로, 특정한 법조항을 어긴 경우 판사나 배심원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법으로 정한 최소한의 형량을 살게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이 제도가 안착된 뒤 미국에선 재소자가 폭증하고 유색인종 및 가난한 계층의 구속률이 크게 올라가 논란이 됐다. 마약의 종류마다 적용되는 의무형량도 천차만별인데, 개중 유색인종과 가난한 이들이 주로 향유하는 마약의 의무형량이 크게 엄격해진 탓에 이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는 논란이 미국 사회를 달구기도 했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이 제도를 크게 완화하고 끝내 폐지했으나 트럼프 정권에서 다시 복원했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미국 정치사에서 끊이지 않는 논란을 제공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무튼 드라마 속 대통령은 이 제도 아래 판사들의 재량이 침해받고 있으며, 사건의 내밀한 부분들을 살피기보다 검사들이 불필요한 범법자를 양산하는 부작용만 낳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게 대통령 특별사면이란 입법부가 충분한 고려 없이 범죄의 처단이란 명분 아래 내놓은 제도의 폐해를 얼마간 완화할 분명한 수단인 것이다.

바틀렛의 명령을 받은 조쉬(브래들리 윌포드 분)는 구체적인 검토를 자신의 비서인 다나(자넷 멀로니 분)에게 일임한다. 다나에겐 법무부 추천을 받은 후보자 서른넷 가운데 셋을 추리란 임무가 떨어진다. 다나는 파일을 열고 그들의 내밀한 사정을 읽어가기 시작한다.
 
 <웨스트 윙> 스틸컷
<웨스트 윙> 스틸컷NBC
 
사면제도 둘러싼 진지한 고민들
 
<웨스트윙>은 미국 사면제도의 단면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사면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로비들과 사면에 대한 거센 비판, 이를 완화하기 위해 감정적인 부분을 건드리려는 공보국의 노력, 정치적인 이해관계나 혹시 있을지 모를 여론 변화에 대한 염려 등이 구체적으로 불거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작용과 반작용 가운데서도 사면이 미국사회에 긍정적 역할을 하리란 대통령 바틀렛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특별히 사면을 맡는 변호사를 찾아 격려하고 사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새긴다. 또한 사면대상자에 오른 도노반이란 청년의 어머니가 민주당의 최대 후원자 가운데 한 명이란 사실을 알게 되자 역풍을 우려해 그를 제외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한다. 어머니가 최대 후원자이기에 도리어 불이익을 주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마침내 결단을 내리는 과정은 정치의 다양한 면모를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다나는 그녀대로 책임을 다하려 한다. 서른네 명 후보자의 사연은 모두가 절절하고 나름대로 억울하다 여길 만한 대목도 충분하다. 적잖은 이가 탁상 앞에 앉아 지나치게 강경하게 만들어진 법률의 피해자로 삶을 지옥 같은 곳에서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집으로 돌려달라는 애절한 탄원이며 명백한 법 적용의 실패를 바라보며 다나는 그들 중 셋을 추려내야 하는 자신의 임무가 얼마나 많은 가능성의 상실이 이어질지 두려워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찾는 이들과 만남을 피하려는 상급자들과 달리 그들을 직접 만나 상황을 솔직히 설명하려 노력한다. 이 사실을 안 대통령은 그녀를 부르라며 "백악관이 피하려는 일을 그녀는 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웨스트 윙> 스틸컷
<웨스트 윙> 스틸컷NBC
 
한국의 사면제도를 돌아보게 한다
 
대통령은 사면과 함께 참모들이 준비한 연설을 힘차게 읽어 내려간다. 그 가운데는 이번 사면에 소위 정치인이나 기업인 등 거물들이 포함돼 있지 않다는 점이 명시돼 있다. 그저 그들의 사법제도가 여전히 불완전하며 불의의 피해를 낳고 있다는 사실, 사면이 이를 완화할 수 있는 제도란 점 등이 지적된다. 반응은 긍정적이고 국회와 언론, 여론 모두가 백악관의 결정을 환영한다. 그렇게 드라마는 관용이 가져오는 역할과 효과를 보여준다.
 
실제로 미국의 사면은 한국과는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200만 명이 훌쩍 넘는 수감자를 가진 미국의 현실에 발맞춰 법적 조력을 충분히 받지 못한 형사피고인이 사면의 중심이 되는 사례가 많다. 형사사법정책의 결함을 사면을 통해 보완한다는 인식이 그들의 법체계 가운데 흐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여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을 사면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나 유력자들을 줄줄이 사면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탄핵을 당할 위기에 서기도 했다.
 
반면 한국에서 사면은 노골적으로 유력자들에게 행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뒤 민주화를 짓밟은 전직 대통령부터, 국정을 농단한 전 대통령에게 사면이 이뤄졌다. 그뿐인가. 한국의 기업인들은 그 중한 범죄혐의들에도 불구하고 사면이 이뤄지지 않은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 법체계가 그들에게 이미 관대하여 집행유예 이상의 처벌을 내리는 사례가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에게 사면까지 너그러이 이행되는 건 황당한 일이다. 
 
올해엔 온갖 부패혐의가 인정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이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다. 언론은 한국 사면제도가 그간 어떤 계층에게 주로 이뤄졌는지, 또 이 제도가 어째서 한국에 필요한지를 깊이 있게 다루지 않는다. <웨스트윙>과 같은 드라마가, 이 작품에서 다뤄지는 그들의 진심 어린 정치가 부러운 이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웨스트 윙 NBC 사면 대통령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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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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