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1 <시사직격>

KBS1 <시사직격> ⓒ KBS1


"이 곳에 들어오는 자들은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구절로, '지옥의 문'에 들어서기 전에 새겨졌다는 경고문이다. 천국을 기대하며 들어섰던 그 곳은 어쩌면 지옥일 수도 있다.

가상자산을 이용한 신종 다단계 사기가 급증하면서 디지털 취약계층인 노년들이 타깃이 되고 있다. 행복하고 편안한 노후를 꿈꾸며 가상화폐 세계의 문을 두드렸던 많은 노인들은 코인 다단계의 늪에 빠져 인생 말년에 고통스러운 지옥을 맛보고 있다.
 
지난 16일 방송된 KBS1 <시사직격>에서는 '노년을 노리는 코인 다단계의 덫' 편이 방송됐다.

53세의 김미영(가명) 씨는 한 코인회사에 투자설명회에 참여한 후, 장및빛 희망을 품고 모친과 가족들의 돈까지 더하여 억대의 금액을 가상화폐에 투자했다. 하지만 1억원 어치를 투자했던 김씨에게 현재 남은 잔액은 약 20여만원에 불과했다. 김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원형탈모 증세까지 생겼고, 돈을 갚느라 다시 신용카드 대출까지 받으며 빚이 점점불어나고 있는 악순환을 차마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장경순(가명) 씨는 안정된 노후를 꿈꾸며 대출까지 받아 코인에 투자했으나 지옥문이 열렸다. 장씨가 투자했던 코인은 개당 5500원까지 갔던 가격이 현재 약 10원까지 추락했다. 6-7천만 원을 날린 장씨는 60대의 나이에 최근 식당에서 일을 시작해야했다.
 
최근 몇 년간 사상 최고의 수익률을 기록한 가상자산은, 디지털 세대라 불리우는 2030세대 청년층이 투자를 주도했고, 대한민국은 코인 열풍에 휩싸였다. 하지만 코인열풍에 열광한 것은 청년들만이 아니었다. 많은 노년층들이 안정된 노후보장과 수익성을 기대하고 코인에 투자했다가 큰 낭패를 봤다.
 
제작진이 섭외하여 한 자리에 참석한 'P코인 투자 피해자 모임'은 전국에 걸쳐 60대 이상의 고령층이었고 1억 이상 고액 피해를 본 노인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날렸다는 허탈감과 억울함에 눈물을 흘렸다. 일을 하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된 노인들은 앉아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고수익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었고, 집을 팔거나 돈을 빌려서까지 코인에 투자한 이들도 있었다.
 
74세의 화가였던 최헌영(가명) 씨는 투자처를 찾다가 P코인 회사의 제안만 믿고 무리한 투자를 강행하다가 막대한 손해를 봤다. 최씨는 생활고에 지쳐 코인을 팔겠다고 해도 회사가 계속 만류했고, 디지털에 서툰 노인들의 약점을 노려서 스스로는 로그인이나 판매도 이중삼중으로 어렵게 만들어놓는 등, 각종 꼼수를 쓰고 있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가까운 지인의 권유로 코인 투자설명회에 참석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때 투자열기로 북적였던 회사 센터는 지금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다른 사무실로 바뀐 상태였다. 2년간 코인에 투자했다가 억대의 돈을 날린 67세의 피해자 황은정(가명)씨는 오른다던 코인이 왜 폭락했는지 그 이유만이라고 알고싶다며 답답해했다. 

피해자의 투자피해 과정은 이렇다.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센터에 보낸다. 투자 센터는 직접 코인투자가 서툰 노년층을 대신하여 P코인 회사의 가상화폐를 대신 구입해줬다.

또한 센터에서는 투자설명회 참가자들 수십명에게 고액의 식사를 대접하고, '텐텐백'이라는 SNS 대화방을 개설하여 투자성공사례를 홍보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았다. 가상화폐 10만 원을 10만개 모으면 10억이 된다는 의미의 텐텐백은, 노인들에게 가상화폐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겼다. 또한 투자설명회 참여를 권유하거나, 구매업무를 대행해준 센터측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본업이 있거나 신분이 확실하다는 것을 어필하며 신뢰를 얻었다.
 
노년층 투자자들은 젊은 층에 비하여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서툴다보니 코인을 사고파는 것도 전적으로 센터 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센터는 폭락하는 가격에 불안해하는 투자자들에게 '가격이 올라갈 거니까 조금 있다 팔라"면서 계속 부추겼다.
 
제작진은 수소문 끝에 당시 P코인 지역센터에서 근무했던 직원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들도 시작은 투자자였다고 고백했다. P코인은 투자자가 새로운 투자자를 모집해오는 다단계 마케팅으로 영업망을 확장했던 것. 투자자들의 투자액은 대부분 이러한 수당으로 지출됐다.
 
다단계 수당 종류는 추천, 후원, 추천매칭, 공유 수당으로 나뉘어졌고, 조직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차등 지급됐다. 이에 따라 윗선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중복 지급으로 하루 6천만 원 이상의 고수익이 가능했다.

P코인 지역센터장을 지냈다는 김가현(가명)씨는 "다단계 마케팅 계획을 세운 사람들이 몇 명이 있다. 그러면 구조를 마케팅에 치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P코인 업체는 다단계 중간책인 각 지역센터를 통하여 여행권이나 자동차까지 경품으로 내세우며 투자자 모집에 열을 올렸고,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모여들었다. 하지만 코인 가격의 폭락으로 다단계 피라미드도 순식간에 무너졌다.
 
코인 다단계 사기의 피해는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도 가리지 않았다. 60세의 코인 피해자 임석현(가명) 씨는 암환자였고 다니던 병원의 간호사로부터 P코인을 처음 소개받았다. 본인같은 암 환자에 큰 효과가 있다는 신종 면역 치료를 P코인으로만 결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임씨가 투자한 금액은 4-5천만 원에 이르렀다.
 
또한 임씨는 본인만이 아니라 지인들에게까지 투자를 권유했다. 업체에서 소개비 개념의 코인을 수당으로 주더라는 것. 심지어 임씨는 자녀들의 명의까지 빌려 코인에 투자했다. 하지만 코인 가격의 폭락으로 임씨는 투자한 돈을 모두 날렸고, 회사가 홍보한 코인을 통한 면역치료 역시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다. 제작진은 임씨에게 P코인을 소개하고 투자를 권유했던 병원 간호사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그녀는 "그러지않았다.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듯이 말하면 화가 난다"며 부인했다.
 
다단계 자체는 불법은 아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취재한 코인 다단계의 경우, 합법적인 다단계에서 허용한 후원 수당의 범위를 뛰어넘는 막대한 수당이 최상위 소수에게 쏠렸고, 모집이 한계에 다다르고 더 이상 수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하부 투자자에게 피해가 몰릴 수밖에 없는 함정 구조였다. 자체 개발한 코인이라는 수익성이 불확실한 상품으로 투자자를 모집한 것 역시 분쟁의 여지가 있다. 2021년 기준 가상화폐 관련 불법행위로 검거된 인원은 무려 862명에 이르며 이는 5년 전인 2017년 대비 무려 7배나 증가한 것이다.
 
P코인 개발업체 대표 박민기(가명)씨는 이미 다단계 업계에서는 유명인사로 알려져있었다. 그는 친분이 있던 다단계 업자들과 손을 잡고 주로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대면상담을 진행하며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피해자들은 최근 힘을 모아 박민기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피해자들은 수소문 끝에 간신히 박민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 씨는 "코인이 하나 잘되려면 4-5년을 기다려야한다. 회사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고소고발을 해서 일을 못하게 하면 누가 책임져야하나"고 변명했다.

분쟁의 최대 쟁점은 고수익 보장을 약속했다, 허위정보로 투자자들을 기만했다는 것. 이에 박 씨는 "강제로 투자하라고 한 적이 없다. 제가 10가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가격이 오르고 떨어지는 것은 시장의 원리"라고 주장하며 시종일관 책임을 회피했다. 투자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고통을 받을 동안, 박씨는 화려한 파티를 즐겼고 외국에 나가서 또다른 S코인 사업설명회를 벌이기도 했다.

현재 P코인은 방문판매, 유사수신행위 규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대한 법률위반 혐의 등으로 수사중이다. 그런데 온라인 전문가들은 "사기죄를 입증하려면 처음부터 기만의 의도를 가지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입증해야하는데, 이런 코인이나 다단계 수법의 특징은 일부를 돌려준다는 것이다. 마치 수익이 발생하는 것처럼 돌려주는 사례를 가지고 사기죄를 입증하는 게 어렵다"고 설명했다.
 
코인 사기로 인한 피해 신고가 급증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법적으로 구제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가장 큰 문제로 "현재 실질적으로 가상자산에 투자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은 없는 상태다"라고 지적하며 "블록체인을 과연 금융이라고 볼 수 있느냐의 개념도 아직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하다보니, 금융위나 금감원도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회피하는 실정이다. 법 적용에 있어서 애매한 부분이 먼저 해소가 되지 않으면, 가상화폐 투자로 인한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한다. 
 
5만명에 이르는 투자자들의 투자금 3조원을 가로챈 '조희팔 사건'은 국내에서 이른바 다단계 범죄 사건의 대명사로 꼽힌다. 최근 가상화폐 열풍과 결합한 신종 코인 다단계 사건은 앞으로 규모가 제2의 조희팔 사건급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최근 이러한 코인 다단계의 피해자들 중 다수가 고정수입원이 없는 고령이거나 은퇴자인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전 재산을 코인에 투자했다가 날린 이들의 노후는 최소한의 생계마저 위협받는 지옥이 됐다.

경찰에 따르면 2022년 12월 P코인 관련 피해자 225명의 피해액만 현재까지 132억에 이른다. 엄연히 피해자가 있지만 미비한 법규정으로 인하여 사기죄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이처럼 법의 사각지대에서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며 진화하는 범죄를 우리 사회에서 막지 못한다면, 언젠가 그 피해는 어쩌면 나 혹은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올 수도 있다.
시사직격 가상화폐 다단계 디지털취약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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