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인의 연인> 스틸
(주)시네마달
위태로운 십대의 성장통을 다룬 한국독립영화는 사실 넘쳐난다. 아무래도 독립영화의 주요 창작집단인 20대, 30대들에게 자전적 경험과 함께 한국사회가 날이 갈수록 후속세대에겐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희망 없는 미래상을 보여주기 때문일 테다. 그런즉슨, 아주 익숙한 소재인 동시에 레드오션도 이만한 게 없을 지경인 셈이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비슷비슷해 뵈는 방황하는 십대 이야기 가운데 <만인의 연인>이 독자적인 입지를 찾으려면 특기할 만한 지점을 반드시 찾아야 마땅한 상황인 것이다. 과연 어떤 방법론으로 돌파가 가능한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궁금했다.
처음 언급한대로 이 영화는 한발만 엇나가면 식상하거나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지경에 떨어지기 딱 좋은 얼개를 지녔다. 지뢰밭처럼 펼쳐진 함정과 암초투성이를 헤쳐 나가며 영화는 주인공 유진의 험난한 18살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펼쳐야만 한다. 과연 식상하거나 전형적이지 않게 그 험로를 돌파할 수 있을까란 물음은 포스터 정면에 자리한 주인공 유진의 순진무구해 보이는 표정 때문에 더 증폭되기만 한다. 그렇게 괜히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행히 염려하던 바를 상당부분 분쇄하는 성취를 보여준다.
대개 이런 청춘 잔혹사의 주인공이 되는 유형의 캐릭터는 어지간히 박복하게 마련이다. 유진 역시 자기 본의와는 다르게 수차례 위기에 빠지곤 한다. 의지할 곳 없는데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10대 소녀 캐릭터라면 우리는 어느 순간 불온한 상상을 시작하곤 한다. 그리고 그 상상 속에서 대개 주인공은 수동태로만 고착된다. 운 좋게 불행을 피하더라도 누군가의 도움에 의해서이고, 곤욕을 치러도 결국 타자의 주도하에 피해자로서만 존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1970, 1980년대 호스티스 영화까진 아니더라도 본의건 역부족이건 간에 적지 않은 독립영화에서도 그런 가련한 피해자 캐릭터는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이 영화, <만인의 연인>에서 유진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다. 18살이라는 주인공의 나이는 아직 온전히 자립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아무리 어른 행세를 해도 피할 수 없는 실수가 속출하는데다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면모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유진 역시 그런 순탄치 않은 굴곡을 코스 밟듯 하나씩 차례로 겪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와 주인공의 개성은 바로 그 순간부터 작동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국문제목과 영문제목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유진은 두 남자 사이에서 방황하길 거듭한다. 하지만 유진은 '어른'인 엄마 영선이 맹목적으로 갈망하는 창호와의 사랑으로 도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만의 결론으로 향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유진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는다. (심지어 그중에는 회복 불가능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가책을 느끼고 미안해할지언정 유진은 자신의 욕망에 더없이 충실하고 그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유진은 비록 매 순간마다 좌충우돌 갈팡질팡하긴 하지만 놀라운 회복력을 보인다. 비록 시행착오를 거치며 스스로도 실수와 패착에 고통을 받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는 관계를 스스로 선택하고 이를 얻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 과정에서 흔히 '가련한 10대 소녀'가 빠지는 함정에 처할 위태로운 순간들을 자기를 지켜내며 돌파해나간다. 그리고 그런 방황과 일탈로 인한 결과에 직면해서도 처연히 울거나 숨어버리는 대신에 담담히 자신이 일으킨 나비효과에 대해 반문하며 성찰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두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매 순간마다 관계를 결정하고 주도하는 건 유진의 몫이다. 그 과감하고 도발적인 눈빛이 위태로워 보일지언정 후반에 그녀가 결론에 도달하는 광경을 확인한다면 이 캐릭터의 독보적인 입지를 확신할 수 있게 될 테다.
신예와 베테랑 연기자들의 조화가 구현한 영화적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