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포스터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포스터찬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라는 말에 다들 어떤 관계를 떠올리시는지. 나는 대번에 자매나 모녀 사이를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언니와 속옷을 공유했으며 20대에는 상표도 뜯지 않은 내 속옷을 엄마가 몰래 꺼내 입어 크게 싸운 적이 있다.

그 속옷은 실컷 늘어나 다신 입을 수 없게 되었지만 더 화가 났던 것은 내 물건을 아무런 양해 없이 가져갔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며 화내는 내게 엄마는 더 큰 화로 대응했다. 그깟 속옷이 대체 무슨 대수이길래 엄마를 잡아먹으려 드냐며 분노를 표한 것이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엄마는 들고 있던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으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이러니 이 영화를 보며 도무지 남일처럼 여길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 영화 속 모녀는 실재하기 힘들다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극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블랙코미디로 볼 만한 요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인 '수경'이 내 엄마와 비슷한 점이 많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굳어 버렸고, 딸인 '이정'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고 얼굴이 화끈거려야 했다. 

영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렇다. 각각 40대 후반과 20대 후반인 수경(양말복 분)과 이정(임지호 분)은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격하게 다툰 어느 날,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들이받는다. 수경은 자동차 급발진 사고라고 주장하지만 이정은 이를 믿지 않아 법정에서도 반대 측 증인으로 나선다. 

자동차 급발진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중심에 있긴 하나 그것을 제하고 보더라도 부족함이 없는 영화다. 섬뜩할 정도로 모녀 관계를 충실히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겠으나 엄마와 딸은 다른 가족 구성원과는 또 다른 관계를 맺고 있거나 그것을 기대받고 있지 않던가.

초반부, 이정의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수경은 장성한 딸을 때릴 정도로 폭력적이면서도 '다혈질'이라는 말로 가볍게 치부한다. 딸에 대한 연민은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로서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나 지났는데 독립할 생각도 없는 딸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 와중에 지나간 옛일로 사과를 요구하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수경이 차갑게 묘사되는 동안 내 안의 이중적인 감정과 싸워야 했다. 납득할 수 없는 폭력을 쓰던 엄마에게 늘 분노했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갖고 있던 나는, 마땅히 이정의 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수경의 편이 되고 싶었다. 수경의 삶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줄타기를 하는 동안 여전히 내 안에서 엄마와의 분리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어서 차라리 나를 미워하기를 택하게 만드는 존재. 내겐 오직 엄마뿐이며 이 또한 나의 독립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어쨌거나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는 공정한 시선을 보여주었고 나를 안도하게 했다. 애써 수경의 편을 들 필요도 없었다.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찬란
 
수경은 39kg의 몸으로 4kg이 넘는 우량아를 낳아 홀로, 꿋꿋하게 키워냈다. 좌훈방을 운영하며 손님들의 몸속 노폐물은 물론, 감정적인 찌꺼기까지 받아주는 노동을 하며 열심히 살아왔다. 이제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 살고 싶은데 다 큰 딸이 응석받이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 늘 현재에 충실한 수경으로서는 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이쯤에서 인정해야겠다. 장성한 이정이 사과를 요구하며 사랑을 확인받으려 드는 장면은 그대로 나를 떠올리게 했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그녀를 향한 공감이나 연민이 아닌, 뜻밖의 공포였다. 어쩌면 전 사회적인 모성에 대한 압박은 딸이나 아들, 남편, 또 다른 친근한 얼굴로 나타나 엄마들의 멱살을 움켜쥐지 않았을까.

물론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를 보낸 이정에게 그만 좀 징징대라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녀도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경은 이정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랑해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격하게 환영한다. 끝까지 가는 140분의 여정을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글을 남긴다. 

사족이지만, 나의 엄마는 내 글을 절대로 보지 않는다. 링크를 보내드린 적도 있지만 그녀는 일언지하에 읽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서운하냐고? 천만의 말씀.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그녀의 그림자 없는 세계를 조금씩 열어나가고 있다. 복잡한 애증 속에서 허덕이며 보다 산뜻한 가족 관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영화, 다시 한번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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