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찬란
 
괴물 같은 신인이 모인 영화다. 독특한 제목에 이끌려 봤던 영화인데 140분 동안 캐릭터와 일상 에피소드에 매료되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모녀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에는 딸의 입장에 이입해 보았는데 어느 순간 엄마의 입장으로 옮겨가게 되더라. 서로가 짐이 되어버린 존재, 삶 자체가 버거웠을 모녀를 생각하니 잔잔했던 가슴에 파도가 일렁인다.
 
영화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극도로 세밀하게 기록된 일상이다. 모녀 보다 여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묻고 답한다. 과연 엄마의 과함은 유난인 걸까, 폭력인 걸까. 누가 누굴 이해해 줘야 할지 복잡한 마음이 커진다. 세상에 단둘뿐인 피붙이지만 심하게 뒤틀려있다.
 
한 마디로 원수보다 못한 관계다. 대체로 엄마 수경(양말복)은 자기 분을 못 견뎌 사사건건 딸 이정(임지호)에게 시비 걸고 때리는 게 다반사다. 딸은 그저 대들지 않고 묵묵히 그걸 다 받아준다. 이 기묘한 주종 관계는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반복된다.
 
하지만 반전이 벌어진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 이정은 참다못해 폭발했다. 사건의 발단은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사고부터였다. 그날도 수경의 시비와 구타를 견디지 못하던 이정이 차 문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씩씩거리며 째려보는 게 분에 겨웠는지 '죽여버릴 거야'라는 말을 내뱉으며 악셀을 밟던 수경. 결국 차는 이정을 들이받았고, 재판으로 이어진다.
 
이정은 실수가 아닌 일부러 낸 사고라고 주장하고, 딸은 법정까지 나서 반박한다. 그 일로 여러 번 엄마에게 사과를 요구하지만 어느 집 개가 짖냐는 식의 싸늘한 반응만 돌아온다. 한집 사는 가족끼리 소송 건 웃지 못할 상황이 이어지며 모녀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진다.
 
사이즈가 다른데 같은 속옷을 입는 불편함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찬란
 
영화 자체가 캐릭터인 영화. 확실한 두 캐릭터가 영화를 이끌어간다. 마치 복수의 화신이 된 듯 불같이 싸우다가도 애들처럼 치사한 방법으로 속을 뒤집어 놓는다. 아끼는 물건을 헤집어 놓는다든지, 차에 낙서를 붙여 놓는다든지 처음엔 장난처럼 보였지만 점입가경으로 돌아가자 무섭기까지 하다.
 
엄마 수경은 자존감이 높은 중년 여성이다. 중학생 딸을 키우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꿈꾸고 있다. 외모를 중시하고 속옷 하나도 허투루 입지 않는다. 5종에 29만 원이나 하는 속옷도 스스럼없이 구입한다. 곱고 맑게 낭만적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염색머리, 립스틱, 속옷, 복분자, 소형차 등 어디를 가나 주목받는 빨간색을 좋아한다.
 
하지만 느리고 답답한 딸 이정이 외모, 성격 아무것도 닮지 않아 불만이다. '엄마가 뭐 저래'라며 딸 졸업식도 참석하지 않은 불량 엄마다. 딸 때문에 재혼도 못 하고 지금까지 억척스럽게 살았으니 충분히 보상받을만하다고 여긴다. 자신을 쪽쪽 빨아먹고 4kg가 넘게 태어난 딸을 제왕절개로 만났을 때, 모유 수유까지 힘들게 했을 때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수경은 이정을 삶의 보상, 하나뿐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까이 살수록 더 복잡해지는 가족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찬란
 
이정은 오히려 엄마 때문에 삶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힘든 삶이 대물림되는 게 다 엄마 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랫동안 폭언과 폭력에 노출되어 성격이 뒤틀렸다고 말이다. 처음 겪어 무서웠던 초경을 '더럽다'를 말로 상처 주는 사람이 우리 엄마다. 따뜻한 말 한마디, 품을 내어 주지 않는 살벌한 부모였다.
 
어린이 교재를 파는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미래가 보장된 건 아니다. 어디 툭 터놓고 말할 상대도 없다. 친구, 연인, 가족도 없는 공허함이 지속되었다. 같이 사는 엄마는 가족이 아니라 동거인이라 생각한다. 매일 다툼이 일어나는 탓에 함께 살기 버거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무시하는 것도 이젠 덤덤하다. 오랫동안 독립을 꿈꾸었지만 '네까짓 게 어딜 나갈 수 있겠냐'라는 오랜 가스라이팅에 돈도 마음도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직장 동료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맞는다.
 
모녀보다 여성 관계로 확장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
영화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스틸컷찬란
 
가족은 피를 나눈 관계이지만 항상 행복과 사랑이 넘쳐흐르는 건 아니다. 가까이 있어 더 복잡한 애증의 집단이기도 하다. 집이란 공동 공간에서 확실한 주종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영화 속 모녀는 엄마가 갑, 딸이 완벽한 을이다. 사회가 원하는 모성신화는 없다. 이 상황은 후반부 데칼코마니처럼 반복된다. 혈연관계와 그렇지 않은 관계가 서로 이질적으로 맞물리는 게 이 영화의 포인트다.
 
엄마와 직장 동료에게 상처받은 이정은 진짜 집을 나온다. 어디로 갈지 뭘 할지 정하지 않는 듯 보인다. 관계의 트리거가 되어준 자동차를 폐차하고, 속옷 매장에 들러 속옷을 고른다. 그러나 뭘 골라야 할지 해본 적 없는 이정은 당황해한다. 점원은 생각보다 본인 사이즈를 모르는 분들이 많다며 치수를 재준다. 지금까지 엄마 속옷을 같이 입었다가, 처음으로 본인 속옷을 쟁취하는 순간이다. 이정은 독립은 완성되었고,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영화의 톤앤매너와 튀는 장면이 아직도 인상적이라 잊지 못하겠다. 정전으로 사위가 고요하고 깜깜해진 장면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요즘은 정전이라도 스마트폰이 있고, 주변의 빛으로 집안이 흙빛인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영화는 갑자기 극장에 들어가 적응하지 못해 헤매는 것처럼, 서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점차 익숙해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원테이크로 찍은 듯한 정전 장면은 다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서서히 밝아지는 얼굴을 그대로 포착했다. 그때 이정은 사과를 요구하는 대신 사랑하냐고 묻는다. 가족이라고만 규정하기 힘든 관계를 설명하는 결정적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키노라이츠 매거진과 장혜령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 됩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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