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슈룹'은 우산의 옛 우리말이다. tvN <슈룹>의 방송 초기, 나는 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슈룹'인지 의아했었다. '대치동 학원가'의 궁중판이라는 이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의 홍보문구처럼, 첫 회부터 <슈룹>엔 아이들 공부에 자신의 삶을 거는 엄마들의 경쟁이 펼쳐졌었다. 마치 조선판 <스카이 캐슬>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분위기의 드라마에 아이들의 든든한 '슈룹'이 되어주는 엄마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달리 보이는 인물이 생겼다. 바로 중전인 화령(김혜수)이다. 불안해하고, 늘 전전긍긍하며 아이들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는 화령의 모습은 얼핏 보면 드라마 속 후궁 신분의 다른 엄마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분명 어딘가 결이 달랐다. 화령은 불안해하면서도 아이들에게 공감해주고, 공부를 몰아붙이다가도 궐에 갇혀 사는 아이들의 처지를 안쓰러워한다. 이는 오직 아이들을 세자로 만드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후궁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또한, 이런 화령의 모습은 복잡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현실의 많은 엄마들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 화령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아이들의 '우산'이 되어주려 애쓰는 중전 화령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슈룹>의 포스터
아이들의 '우산'이 되어주려 애쓰는 중전 화령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슈룹>의 포스터 tvN
 
불안한 마음
 
화령은 무척이나 불안한 사람이다. 빠른 걸음걸이와 안절부절못하는 말투는 그녀가 삶의 전반에 불안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잘 표현해 준다. 그녀의 이런 불안은 대체로 자녀들과 관련이 있다. 장남인 세자(배인혁)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자리가 위태하고(5회에 사망했다) 다른 네 형제는 자유분방한 사고뭉치들이다. 학교에 지각을 밥 먹듯 하고, 학업엔 뜻이 없으며, 궐 밖에 나가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아이들이다.
 
이런 중전의 아이들은 궐의 실세인 대비(김해숙)의 미움을 받고 있다. 세자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다른 후궁의 아들 중 한 명이 세자로 임명된다면, 중전과 네 아들은 폐서인이 되거나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화령은 자녀 양육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지고 있다. 아버지인 임금 이호(최원영)는 자녀 양육에 함께하기보다는 화령이 얼마나 아이를 잘 키웠는지를 평가할 뿐이고, 대비는 수시로 "양육이 중전의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잘 키웠다'는 양육의 기준은 아이가 자신의 개성을 발휘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닌 학문에 정진하는 것뿐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엄마 화령은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같은 화령의 모습과 지금 대한민국 엄마들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자녀 양육의 책임을 대체로 엄마들에게 묻고 있다. 게다가 양육의 성공 여부는 아이가 스스로 행복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잘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몇 개의 직업을 갖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드라마 속 조선시대 엄마들의 상황과 2022년 한국의 엄마들이 처한 상황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불안을 투사하지 않는 엄마, 화령
 
때문에 지금 한국의 엄마들은 드라마 속 엄마들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많은 엄마들은 이 불안을 자녀들에게 투사한다(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슈룹>의 후궁들이 온갖 과외를 시켜가며 아이들을 공부시키듯, 요즘 엄마들 역시 사교육에 아이를 맡기며 자신들의 불안을 달랜다.

때로는 고귀인(우정인)처럼 "난 내 모든 걸 너한테 걸었다. 절대 이 어미를 실망시키지 말아라"(8회)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고귀인의 아들 심소군(문성현)이 이런 엄마를 위해 위험을 참아내듯, 요즘의 아이들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엄마'를 위해 공부를 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엄마들이 불안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다른 선택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화령은 계성대군의 성정체감을 존중해준다.
화령은 계성대군의 성정체감을 존중해준다. tvN
 
하지만, 화령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달랐다. 그녀는 불안할지라도, 이 불안을 아이들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아들 중에 왕세자가 나오기를 바라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가 모든 걸 걸었으니 반드시 왕세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을 설명하고, 그 필요성을 각자가 판단하게 할 뿐이다. 스스로 결심한 덕분에 성남대군(문상민)은 택현이 열렸을 때 "자신 있습니다"(8회)라며 진심을 다해 경연에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계성대군(유선호)의 특별한 성정체감을 알게 되었을 때도 화령은 그를 존중해준다. 놀라고 당황해 한바탕 눈물을 흘리긴 하지만, 이 감정을 그대로 아이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진짜 모습'을 표현할 기회를 주고, 자신의 비녀를 선물하며 그의 정체감을 인정해준다(3회). 4회 어린 대군들이 몰래 궐 밖으로 나가 놀다 왔을 때도 야단을 치긴 하지만, 자유롭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엔 공감해준다. 또한 극도로 불안한 여러 일들이 겹쳤던 6회에도 손주인 원손 앞에서는 불안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이와 내가 '다른 사람'임을 전제한 마음
 
도대체 어떻게 화령은 자녀들에게 자신의 불안을 투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는 화령이 아이와 나는 '다른 사람'임을 늘 기억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삶과 자녀의 삶을 구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뱃속에서부터 모든 걸 함께 하며 키워낸 자녀는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자녀가 자라난 세상과 부모가 자라난 세상은 엄연히 다르다. 또한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기질을 타고난다. 때문에 아무리 부모와 자녀라 할지라도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저마다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화영은 이 지점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3회 계성대군의 성정체감을 알았을 때 당황스러운 자신의 마음'에 매몰되지 않고 "넘어서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을 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라며 아이의 '다른 마음'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온갖 반칙을 해서라도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만들려고 하는 후궁들과 달리 아이들을 믿고 원칙을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자신의 불안과 아이들의 마음을 구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너도 원했잖아. 시작은 내가 아니라 주상이었습니다"(7회) 라며 자신이 저지른 악행까지 자식인 주상의 탓으로 돌리는 대비와도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화령이 이렇게 자신과 자녀들의 삶을 구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 스스로가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화령은 2회 이런 말을 한다.
 
"알아 나도. 궁인들도 막 수군대더라고. 외척을 견제한 선왕께서 한량 집안인 나를 간택하셨다고. 근데 그거 아니야. 내가 걔네들 싹 다 이겨 먹었거든."
 
이처럼 화령은 자신의 삶을 결코 수동적인 상태로 놓아두지 않는다. 자신이 지닌 한계는 수용하되, 주체적으로 살아간다. 때문에 화령은 자녀들 역시 각자가 삶의 주인공임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신과 아이들을 분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전 화령은 불안한 엄마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불안을 아이들에게 투사하지는 않는다.
중전 화령은 불안한 엄마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의 불안을 아이들에게 투사하지는 않는다. tvN
 
화령의 이런 태도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화령의 아이들은 모범생은 아니지만, 타인을 배려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를 지녔다. 이들은 마냥 개구쟁이 같다가도 스스로 동기화될 땐 진심을 다해 공부하고 도전할 줄도 안다. 이는 엄마 탓을 하며 열등감에 시달리는 보검군(김민기)이나 엄마의 뜻대로만 사는 심소군,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엄마와 같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의성군(강찬희)과는 분명 다르다.
 
택현이 치열해지고 있는 지금, 누가 세자가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아이가 건강한 마음을 지닌 어른이 될지는 이미 자명해진 것 같다. 또한, 엄마들을 몰아세우고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가 어떤 아이들을 키워내는지도 드러나고 있다. 엄마가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 자신의 불안을 아이들에게 투사하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슈룹>은 보여주고 있다.
 
나는 <슈룹>을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한다. 엄마들에게 양육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사회, 성공의 기준이 각자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인 사회, 그리고 엄마들의 다양한 삶이 존중받는 사회. 이런 사회가 된다면 현실의 엄마들도 화령처럼 자신의 불안을 아이에게 투사하지 않고 아이들을 존중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될 때 부모가 아이들을 지켜주는 진정한 '슈룹'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고, 아이들 역시 보다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슈룹 김혜수 모성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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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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