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 여성 백년사 1부, 신여성 내음새
EBS
1915년 <매일신보>에 19살 동경 유학 중인 여학생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동경 유학을 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던 시절, 그중에서도 10명도 안 되는 여학생들은 당연히 주목의 대상이었다. 실종된 여학생이 바로 김명순이었다. 평양 갑부의 서녀였던 김명순은 일찍이 동경 유학을 떠났다. 재학 중 소개로 만난 해방 후 초대 육참총장이 된 당시 일본 육군 소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며칠 후 학교로 돌아온 김명순,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학교와 사회 그리고 동료 학우들은 그녀를 '남자를 유혹한 헤픈 여자' 취급을 했다. '여자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라는 식이었다. 결국 학교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고 만다.
하지만 김명순을 그런 처분에 굴복하지 않는다. 귀국을 해서 다시 숙명여고를 졸업한 김명순은 1917년 최남선이 발행하는 <청춘>에 단편 소설 <의심의 소녀>를 응모해 2등으로 당선, 등단을 하게 된다. 이제 막 근대적 소설이 등장하던 시절, '교훈적 주제에서 벗어난 <무정>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이광수의 극찬을 받으며 김명순은 최초의 여성 소설가가 된 것이다.
이후 김명순은 '쥐같은 남자에게 짐승같은 팔 힘으로...', '창부같은 계집이라... 일본 남자와 연애한 줄...',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낱낱이 고발한 <탄실이와 주영이>를 1924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하지만, 주변 문인들은 일찍이 자유 연애를 하며 살던 신여성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그녀의 작품이 아닌 사생활을 들어 협잡에 가까운 비평을 일삼았다.
당시 대표적인 사회주의 계열 비평가였던 김기진은 1924년 <신여성>에 <김명순 씨에 대한 공개장>을 싣는다. '착한 처녀인지 보증할 수 없다'라던가, '거친 생활을 한 타락한 여자'라며 그녀의 작품에 대해 '분냄새 나는 시'라고 폄하했다.
'이 단편집을 오해받아온 젊은 생명의 고통과 비탄과 저주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노음니다.'
- 김명순, <생명의 과실> 머리말 중
이에 대해 김명순은 <김기진 공고문을 무시함>이라는 글을 당시 <신여성>에 투고했지만, 잡지 광고에서 등장한 김명순의 글은 정작 발간된 잡지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25년 시 24편, 소설 2편, 수필 4편이 실린 작품집 <생명의 과실>을 발표했다. 또한 5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공채를 거쳐 <매일신보>에 입사, 이각경, 최은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여성 기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문인들의 비판을 넘어선 비난은 끊이지 않았다.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 선생조차,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남편을 다섯이나 갈았다'던가 식의 가십성 기사를 써, 김명순으로부터 명예훼손 고소를 당할 정도였다.
조선아,
이 다음에 나갓튼 사람이 나드래도/ 할 수만 잇는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이 사나운 곳아
- 김명순, 시 <유언> 중에서
결국 김명순은 더는 조선에서 그녀의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녀는 생활고와 정신병에 시달리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방정환, 김기진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조차 '신여성'이자 능력있는 문인이었던 김명순에 대해 파렴치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던 시절, 그 시절에 대해 <여성 백년사>는 당시의 한 광고를 들어 말하고자 한다. 전차에 다리를 드러내고 앉은 여성들, 그녀들의 다리에는 '피아노 한 채만 사주면, 문화 주택만 사주면 일흔 살이라도 괜찮아요', '돈도 없고, 신경질은 많고, 집세 낼 돈도 없어요', 바로 이 광고가 그 시대가 '신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신여성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했던 김명순은 결국 조선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고 프로그램은 말한다. 토크멘터리의 형식으로 '미래를 알 수 없다면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살았던 과거의 인물에게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취지에서 기획된 <여성 백년사>, 과연 선각자였던 김명순의 삶을 제대로 조명했을까?
희생양 아닌, 주체적 인간상의 조명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