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번째 아이> 스틸 이미지
㈜더쿱디스트리뷰션
감독은 누가 봐도 극단적인 설정(빚을 떠안는다거나 사고를 일으켜 보상해야 한다거나 보이스피싱으로 사기를 당한다거나 등)을 전제로 깔고 극중 상황에 등장인물들을 끼워 넣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그런 안일한 선택 대신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 불운을 모사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부류의 사건들은 내가 아닌 타인들에게 닥칠 때는 우리가 무심코 쉬 지나치거나 방관하곤 하는 상황들에 가깝다. 그렇게 재수 없으면 터질법한 수위의 상황을 배치하는 대신에 이를 조밀하게 해부하는 방식을 택한다.
주인공인 정아는 겉으론 삶에 별 어려움이 없어 뵈는 캐릭터다. 대기업 정규직인데 남편 역시 자신의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중이다. 거기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아이도 건강하게 자라는 중이다. 부부 사이에 특별한 가정불화나 경제적 어려움도 없다. 제법 살만한 아파트도 임대가 아닌 자기소유로 보인다. 거기에 극중에선 시댁과의 고부갈등이나 친정 관련 사건사고도 드러나지 않는다. '헬 조선' 20-30세대 중에선 은수저쯤 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겪는 실존적인 위협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걸 영화는 거듭 닥치는 위기와 시련으로 구현해낸다.
주인공이 대기업 정규직이기 때문에 남들은 감히 쓰지 못하는 육아휴직도 눈치 안보고 찾아서 쓰는 축복받은 존재라는 냉소는 굳이 <첫번째 아이>를 본 소감에 끼워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그런 상대적으로 괜찮은 형편에 속한 존재라도 운명의 장난 마냥 한번 일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겉잡을 겨를도 없이 수습이 불가능한 나락으로 추락하게 되는 위태로움이 영화 전체에 감도는 것에 주목해야 할 법하다. 한국사회에서 최고상위 기득권 계층이 아니라면 이제 그런 불안정성은 상시적이 된 상태다.
(영화 도입부에서 보여준 것처럼) 친정엄마가 쓰러진다. ⇒ (대인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덕분에) 일단 친절한 위층 이웃에게 의지한다. ⇒ 급한 불 껐으니 신속하게 어린이집 이용을 신청한다. ⇒ 하지만 대기자가 잔뜩 밀려 있는 상태다. ⇒ 보모를 구한다. ⇒ 구하긴 했는데 믿을 수 없다. 정아에게 닥치는 육아의 위기 패턴은 대충 이런 수순으로 진행된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선택지의 정석이 차례로 난관에 봉착하고 마는 전형이다.
그런 고난을 감수하면서도 포기를 할 수 없었던 정아의 직장생활도 순조로움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는 중이다. 정아는 자기 일도 척척 잘 해내 인정받고, 곁들여 자기 대타로 들어온 지현도 돌봐주고 싶다. 하지만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던 열혈 커리어우먼에서 육아휴직 복귀 이후에는 야근 대신 칼 퇴근과 반차를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현재의 정아는 눈칫밥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상태에서 애초에 1년 계약직 알바 용도로 채용된 지현을 품는다는 건 정아의 능력과 입지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송 팀장은 정아를 타박하면서도 정아는 지현과 다른 존재, 사실상 상위계급으로 선택받은 이라며 충고한다. 지금 물러나 앉으면 다시 현재의 위치로 돌아오긴 어렵다는 걸 직시하라고 말한다. 이제 그녀 앞에는 회사형 인간이냐 전업주부냐 양자택일해야 할 순간이 강제적으로 다가온다.
상황에 지치고 실망스런 정아는 이국땅에서 자신의 아이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고된 노동과 인격적인 치욕을 기꺼이 감내하는 화자를 보면서 어떤 감흥을 느낀다. 한편 자신은 이미 놓쳐버린 기회, 즉 비혼주의를 고수하며 일과 자유를 쟁취하고픈 '야망캐' 지현에겐 묘한 질투와 적대감, 그 가운데 아쉬움이 복합된 감정을 체감한다. 과연 지현과 화자 사이에서 정아는 어떤 결단을 하게 될 것인가?
속 시원한 결말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독히 현실적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