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탑> 메인포스터
(주)영화제작전원사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중년의 영화감독 병수(권해효 분)는 딸 정수(박미소 분)와 함께 인테리어 디자이너 해옥(이혜영 분)의 건물을 찾는다. 미술을 그만두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배우고 싶어 하는 딸을 소개하고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해옥의 소개로 비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건물을 구경한다. 4층 건물을 매입해서 직접 고쳤다는 디자이너의 소개로 병수와 정수는 2층에 있는 원 테이블 식당에서부터 옥탑까지 건물 곳곳을 소개받는다. 각층의 방을 모두 구경한 끝에 지하 작업실에서 다시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세 사람. 갑작스럽게 걸려온 영화사 대표의 전화를 받고 감독이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어색하게 남게 된 두 사람만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언제부터였을까?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조금씩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극의 형식보다는 이야기와 대화에 중심을 두고 있던 그의 영화가 전에 없던 새로운 시도들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느낌. 지난 작품 <소설가의 영화> 마지막에 등장했던 장면이 그랬고, 그의 또 다른 영화 <인트로덕션>에서 제목 그대로 서문의 형식을 활용하던 아이디어가 그랬다. 원래의 무게 중심을 버리고 새로운 중심을 찾아간다는 느낌은 아니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인물과 대화의 결은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조금 더 색다르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표현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하나 둘 시도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스물여덟 번째 영화 <탑> 역시 동일한 맥락 위에 놓여있다. 영화 속 모든 상황을 오직 한 건물에서만 진행하는 방식은 홍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는 형식이다. 물론 <북촌방향>(2011)이나 <풀잎들>(2018), <강변호텔>(2019)처럼 특정한 장소나 공간을 매개로 이어지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이야기들이 서로를 이어 내기 위함이 아니라 마치 이 건물의 물리적 공간을 대신해 설명이라도 하는 듯 스토리 상의 연결점이 없이도 존재하고 있다는 점, 극 중 인물들이 이 '탑'처럼 보이는 건물을 완전히 벗어날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02.
영화는 구조적으로 건물의 형태를 따라 상승하는 방식으로 극을 완성해내고 있다. 굳이 전작의 이름을 빌리자면, '인트로덕션'(서문)에 해당하는 영화의 첫 지점에서는 1층 식당을 시작으로 옥탑까지 설명하는 과정이 보인다. 이 건물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지 관객에게 주입하는 단계이며, 각각의 공간이 어떤 형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 이미지화시키는 작업이다. 일종의 요약(summary)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이 과정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지하와 2층, 3층 그리고 옥탑의 순서로 탑의 정방향대로 걸어 올라가듯이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1층에서의 이야기는 이미 시작과 함께 다뤄졌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극 중 이야기가 영화에 놓인 물성의 형태를 따라 차례로 쌓이고 있는 구조는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숨을 죽인 채 모습을 감추고 있다. 적어도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정수와 해옥의 이야기와 2층에서 만들어지는 선희(송선미 분)와의 만남, 3층에 놓여 있는 병수와 선희의 내러티브까지는 영화의 스토리 라인 자체도 큰 이질감 없이 자연스러운 연결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층간을 의미하는 블랭크 지점에서 갑작스러운 시차가 벌어지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해 가능한 편집이다.) 문제는 영화의 위치가 4층에 다다르게 되면서부터다. 이 지점에서부터 영화가 이야기의 연결고리보다 이야기를 활용한 물성의 구조화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고 여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병수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영화는 명백하게 자신의 목적이 이 탑을 세우는 데 있었음을 고백한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 존재하는 다섯 개의 덩어리, 각각의 이야기가 서로 제대로 상응하며 하나의 커다란 서사를 이룰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관습에 의한 기대나 바람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영화가 하나의 서사를 갖고 있는 극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하나의 영화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여주더라도 무의식적으로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이어 붙이고자 노력한다. 이 영화 <탑>을 하나의 서사로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분절된 영화 속 이야기들이 서로 이질적이게 느껴질 정도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연결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서로의 이야기가 마주 보고 있는 듯하면서도 다른 이상을 향하는, 어떤 경계 위에서 이루어지는 홍상수 감독의 교묘한 연출과 편집은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