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스틸컷
영화사 진진
어떤 영화는 이해하기 위해 머리가 혹은 가슴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차가운 이성과 지식이 받쳐줄 때 작가의 의도에 온전하게 도달하는 영화가 있고, 따스한 감성과 연민이 솟아오를 때에만 도착 가능한 영화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겸할 때 가치가 극대화되는 경우도 드물게 등장하곤 한다.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다의 그해 여름>으로 인상적인 데뷔작을 선보였던 카를라 시몬 감독의 신작 <알카라스의 여름>은 그런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할 것이다.
영화는 제목이자 배경인 '알카라스' 지방에 대한 송가와도 같다(국내에선 감독의 전작과 연결시키기 위해 <알카라스의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지만 스페인어 원문 제목은 심플하게 지명인 '알카라스'로만 명명되어 있다). 감독은 어릴 적 휴가와 명절을 해마다 이 지방에서 보냈던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여러 삼촌들은 시골마을에서 과수원 농사를 생업이자 천직으로 살아왔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경작하는 토지와 수고의 결실인 작물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났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역인 대가족은 그런 감독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반영한 셈이다.
이런 유‧청소년기 자전적 체험담을 영상화하는 작업은 사실 국내에서도 요즘 드물지 않다. 자기의 유년시절 추억은 비록 상실과 슬픔이 있더라도 적당히 미화하게 마련인지라 종종 그런 작업의 한계를 지적하곤 했다. 하지만 <알카라스의 여름>은 그런 향수 어린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자전적 체험담에 더해 21세기 현재에 농민들이 처한 상황을 결합시킨다. 감독이 누렸던 풍요로운 농촌과 자긍심 넘치고 토지에 애착을 가진 농민들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리를 대기업과 부동산 개발이 차지하고 과거 이 땅의 주인공들은 소멸해간다.
알카라스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상황은 물론, 현재 전 세계의 농촌들이 겪는 공통 문제를 내세우며 사회적 시선을 투영한다. 대량생산을 위해 기계를 도입하고 저임금 노동력에 의지하는 가운데 농촌의 목가적 풍경은 점점 황량한 공장지대처럼 변해버린다. 이는 농업의 근본과 배치되는 불합리한 흐름이지만 우리는 어느새 농업이 견지해온 출발점을 망각해버린 상태다. 감독은 그런 우리의 무관심을 지적한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고 모든 나라에 농업이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주제"라는 확신이 영화 전체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가족 중심의 소농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문명을 지탱해온 핵심 기반이었음에도 이제 대규모 유통과 치솟는 생산비용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해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카라스의 여름>은 스크린 가득한 풍경으로 소환한다.
물론 농민들의 저력은 끈질긴 저항으로 발현되는 중이다. 영화 속 농민들의 시위처럼 대기업의 횡포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런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호소에 응답하는 메아리는 통 들려오지 않는다. 반면에 반대편의 대응은 은미하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수익성이 낮아진 시골의 토지를 이용해 더 많은 이익을 얻길 꾀하는 기득권층의 계획은 그런 농민들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대가족의 선조들이 20세기 전반, 스페인을 휩쓴 내전의 참상 속에서도 인정을 발휘해 지주 가족을 구명해줬건만, 이제 지주의 후손들은 '안 되긴 했지만' 과거의 보은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외면해버리는 셈이다.
영화 후반이 되면 이 재앙의 원인 격인 지주는 더 이상 실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엔 과일나무를 갈아엎기 위한 불도저와 비옥하던 땅을 뒤덮는 태양광 패널들만 물귀신처럼 가족 주변을 어른거릴 뿐이다. 이제 농민들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자신들이 경작하던 땅을 빼앗은 태양광 패널 관리자로 전직하거나 도시로 떠나느냐 양자택일에 내몰린다. 스페인 알카라스의 스산한 상황은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지방 소멸, 농촌 공동화 현상 등의 용어로 보편화되는 중이다.
가족 공동체의 순기능이 드러나는 이 영화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