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디셉션> 스틸컷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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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영국 여성과의 비밀스런 공간에 해당되는 필립의 작업실은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단순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외부로부터 격리되는 공간이 아니라 필립이라는 인물이 극 중에서 갖는 위치 상의 의미를 표현하고 그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향성을 찾아볼 수 있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바깥에 놓인 필립의 아내(아눅 그린버그 분)에게는 의심과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먼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필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들의 위치를 모두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느 하나,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안온한 심리 상태로 놓여있지 않다. 그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작업실을 찾는 여자와 체코로부터 추방당한 여성은 물론, 암으로 병실에 누워있는 로잘리(엠마뉴엘 드보스 분)도 마찬가지다. 필립이 교수이던 때에 그와 밀회를 나눈 제자 역시 마음의 병을 얻어 정신병동에 갇혀 있었고 (현재도 정상적인 심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아내 역시 그에 대한 의심으로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극 중에서 자신의 공간에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고 있는 것은 필립 단 한 사람뿐이다. (남성으로 확장해서 생각해도 역시 그렇다.)
이를 다시 말하면, 극 중 어떤 인물도 자의적으로 공간과 심리를 선택할 수 없었으나 필립만큼은 두 가지 모두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그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상대의 의지에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타인의 대화를 경청하며 이를 기록하는 행위에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소설로 따지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의 위치에서 자신의 곁에 있던 이들을 움직여 온 셈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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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영화는 이 지점에서 '극의 요소'라는 또 다른 설정 하나를 갖다 놓으며 필립의 위치를 활용하고자 한다. 필립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제시하는 여성들과의 일화와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영국 여성과의 밀회를 실제가 아닌 자신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극 연극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다. 이는 영화가 제법 진행이 된 이후, 극의 2/3 정도가 넘어가는 지점에서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로부터 시작되는데, 역시 다른 여성들과의 대화가 기록된 그의 노트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 지점까지 극이 이끌어온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분명히 두 남녀의 불륜이 놓여 있고, 모든 관객이 그에 따른 이해를 해왔을 테지만, 어쩐지 한 편으로는 영화가 실제와 허구 사이의 어떤 가느다란 구멍을 지나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장면 사이사이마다 등장하던 묘한 페이드 아웃 장면과 고의적으로 초점을 상실한 듯한 표현들, 무엇보다 영화 전체를 막(幕)과 막(幕)으로 나누어 무대 위 연극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는 외형적 설정 등이 영화의 바깥으로부터 극 안쪽에 놓여 있는 필립의 주장에 힘을 싣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 영화는 12개의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는 이 영화의 타이틀이 'Deception(기만)'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그 의도가 완전히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의심 아닌 의심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