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피디수첩>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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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유교 선비가 없는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유림들은 불교·천도교·기독교에 비해 독립운동에서 많이 뒤쳐졌다. 이런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김창숙은 유림들을 독립투쟁으로 이끌고자 분투했고, 48세 때인 1927년 일제의 고문을 받고 육체적 시련을 겪게 됐다.
1951년경에 나온 자서전 제목이 <벽옹 73년 회상기>인 것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 벽(躄)이란 한자의 밑부분에 발 족(足)이 있는 데서 느낄 수 있듯이, 1927년 고문은 그에게 하반신 마비를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의미가 자서전 제목에 들어갔던 것이다.
김창숙의 육체는 일제 앞에서 굴(屈)했지만 그의 정신은 불굴이었다. 성대 출신들이 그를 존경하는 핵심 이유는 그것이다. 이런 김창숙의 호를 딴 심산연구회에 청년 김순호가 들어갔다. '심산'이라는 서클 이름이 자신의 어깨를 얼마나 무겁게 하는가를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의 심산연구회 후배인 김귀정 열사는 1991년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에 맞서 싸우다가 최투탄과 구타로 인해 희생됐다. 김귀정은 김창숙의 정신을 이어받아 불굴의 투쟁을 했지만, 김순호는 그렇지 못했다. 열혈 운동권 학생이었던 김순호는 3학년 때인 1983년에 강제 입영되고 이른바 녹화사업에 동원된 뒤로 불굴과 멀어졌다. 빨갱이를 녹색으로 바꾼다는 보안사의 사상전향 사업에 투입된 뒤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녹화'된 그는 학생운동처럼 이 활동도 열심히 했고, 이런 그의 모습이 보안사 기밀 문서에도 담겼다. 방송 8분에 등장하는 1983년 11월 19일자 보안사 문서인 '특수학번자 김순호 제보: 의식화 첩보 보고'에서도 그의 활약상이 확인된다.
김순호 국장은 이 시기 자신의 활동과 관련해 "누굴 만난 뒤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긴 했지만, 친구들과 술 마신 내용 등만 보고해 별일은 없었다"(7분)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보안사 문건에는 그의 침투 목표가 "성대 심산연구회"로 명시돼 있고, 그가 보고한 명단과 인적 사항이 상세히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