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헌트>
영화 <헌트>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조심하시라. 시작부터 두 가지 놀라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헌트> 관람을 위해 극장을 찾은 한국 관객들이 '아니, 이 정도였어?'라는 감탄을 내뱉게 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과장이 아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우선 <오징어게임>의 배우 이정재의 첫 연출작이 맞나 하는 연출에 대한 감탄.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려는 테러범들을 잡기 위해 안기부 요원들이 CIA 요원들과 동분서주한다. 같은 시기 <비상선언>을 선보인 이모개 촬영감독의 흔들리는 카메라는 강렬하고 압도적이다. 일가를 이룬 조영욱 음악감독의 장쾌한 음악이 청각에 호소한다. 캐릭터와 시대 배경 소개부터 장면 설계까지 스파이 스릴러 장르의 서두를 여는 시작으로서 어디 하나 손색이 없다.

첫 장면부터 '살인마 전두환' 화형식 시위가 눈길을 잡아끈다. <헌트>의 시대 배경은 1983년 전두환 군사 독재 시절이다. '남산' 안기부가 음으로 양으로 정치 사회를 주무르며 숱한 고문 피해자를 양산했던 '그때 그 시절'을 데뷔작으로 끌고 들어온 이정재 감독은 '독재자 전두환'이란 쟁점을 비켜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도리어 그런 시대적 쟁점이 극을 이끄는 동력이 되어준다. 오프닝 자체가 데뷔 감독의 어떤 결기를 뿜어낸다. 안기부(현 국정원) 미화라거나 편향된 정치영화라는 오해도 간단히 뛰어 넘어 버린다.

안심하시라. <헌트>는 스파이 장르의 ABC를 충실하게 따른다. 시대물이자 인상적인 액션 장면이 적절히 배치된 상업영화다. 제작비도 200억 넘게 쏟아 부었다. <태양은 없다>로 만난 20년 넘게 우정을 키워왔다는 영화적 동지이자 '청담부부' 이정재, 정우성의 두 번째 만남만으로도 눈이 즐거울 영화다.

이 둘은 물론 조연 배우들에게조차 소위 연기구멍은 찾아 볼 수 없다. 영화 <아수라> 팬들이 '아수라 유니버스'라 부를 만큼, 친숙한 카메오들도 대거 등장한다. 깜짝 등장하는 황정민은 요즘말로 스크린을 씹어 먹을 만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인물들의 적절한 배치와 안배야말로 스파이 스릴러 장르의 재미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그때 그 사람들'을 불러온 <헌트>는 곳곳에 박정희 정권에 이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독재, 남북 분단과 체제 경쟁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가 남긴 그림자들을 기어코 소환하며 어떤 비감을 전달하려 부단히 애를 쓴다. 신인감독 이정재가 이 모든 소재를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며 각본까지 도맡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기대하시라. 2022년 텐트폴 영화 4편 중 막차를 탄 <헌트>는 장르적 완결성이나 감독의 야심 면에선 앞서 개봉한 세 작품과 비교해 데뷔작이라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평단도 호평 일색이다. 이제 이정재 감독의 야심이 안 그래도 전 세계적으로 까다롭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모자라 최근 더 까다로워졌다는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지 여부만 남았다.

쉽지 않은 주제를 뒷받침하는 강렬한 형식

'내부 첩자 동림은 누구인가'. 안기부 해외팀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장 김정도(정우성)의 대립은 이렇게 단순히 한 줄 요약된다. '워싱턴에서의 대통령 암살 시도'란 첫 번째 고개를 넘은 <헌트>는 시퀀스 통째를 단편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꽉 짜인 초반부 일본 장면을 얼개로 스파이 물의 본론을 꺼내든다.

복잡할 것 없다. 첩자가 누구인가를 향해 달리는 스파이 장르는 인물도, 사건도 복잡 할수록 머리만 아파진다. <헌트>도 그런 공식에 치중한다. '둘 중 누가 동림인가'. 박평호를 중심에 놓고 김정도를 양립시킨다. 박평호가 김정도 주변을 캐고, 김정도가 박평호를 압박해 들어간다. 주변 인물과 사건들을 온통 첩자를 잡기 위한 의심과 단서로 흩뿌리고 주워 담으며 알뜰하게 활용한다.

일본에서 망명을 신청한 북한 고위 관리를 포섭하려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  동림이 흘린 정보 때문이다. 박평호가 이끄는 해외 팀원 중 목숨을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양보성(정만식)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입을 열면 해결될 것 같았지만, 그마저도 간첩의 저격으로 물거품이 된다. 맞다. 영화 전반에 드리워진 북의 존재감이 여기서도 확인된다.

때는 1983년. 간첩조작 사건이 횡행하고 군인들이 권력의 최정점에 올라선 시절이었다. 상대를 잡으면 내가 잡힌다. 박정희 암살 사건 직후 고문을 당하는 자와 고문하는 자로 만났던 박평호와 김정도의 딜레마다.

짐작 그대로, 동림의 정체는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자 박평호는 군인 출신인 김정도가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회사 임원을 족치기 시작한다. 김정도는 박평호가 돌보던 재일조선인 출신 대학생 조유정(고윤정)을 잡아다 간첩으로 몰아간다. 그렇다. 이것은 나쁜 놈과 나쁜 놈의 싸움이다.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누가 스파이인가'라는 장르적 외피를 한 꺼풀 벗겨 보면, 이 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사독재에 부역하는 정권 운용의 주역들이요, 눈앞에서 자행되는 민간인 고문을 아무렇지 않게 지시하는 독재자의 하수인들이다. 이정재 감독은 그걸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

그 사이 영화는 첩보 스릴러 장르의 공식과도 같은, 이를테면 요원들과 기관원들의 공작과 도감청, 단서를 추적하는 연결이나 설명 장면들을 곳곳에 적절히 배치,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아니, 단 한순간도 긴장감을 놓아 주려 하지 않는다. 스파이 색출을 위해 김정도와 팀원들이 찾아간 세탁소 액션처럼 과감하면서도 절제미가 돋보이는 액션들이 곳곳에 녹아든다.

둘의 대립이 격화될수록 그 긴장의 수위가 높아지는 장르적 재미는 중후반부 동림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극에 달한다. 그 긴장을 지탱하게 만든 일말의 장르적인 눈속임도 서사를 쌓아올리는 도구로서 납득 가능한 수준이다. 그리하여, 첩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 이후, <헌트>는 하고자 했던 본격적인 질문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감독 이정재의 데뷔작을 응원한다

마침내, 관객들을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이란 거대한 사건의 실체와 직면하게 만들 때 <헌트>는 한낱 배경일 줄 알았던 북의 존재를 확실히 드러낸다. '살인마 전두환'의 시대를, 그 시대 간첩조작을, 그 간첩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고문을, 더 나아가 그 군사독재를 실현케 한 5.18 학살을 소재로만 활용할 줄 알았던 장르영화가 박평호와 김정도의 존재론을 통해 분단과 독재, 권력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예상치 못한 도약이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미권의 스파이 소설이나 영화에서 봄직한 이데올로기 전쟁을 배경으로 유려하고 냉철하며 일관성을 유지하는 전개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을 것 같은 영화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통해 비약할 때 <헌트>는 한국영화로서의 만족감 그 이상을 채워준다.

40대 관객들마저도 기억에서 흐릿할 '아웅산 테러' 사건을 향해 내달린 이정재 감독의 큰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 결말을 향해 내달리기까지, 이정재 감독은 박평호와 김정도에게 총성이 난무하고 피가 튀는 지옥도를 선사한다. 나쁜 놈과 나쁜 놈의 전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그 아이러니한 구도와 설정 자체가 분단이란 무엇인가, 남북이 공히 공유했던 독재란 무엇인가, 그리고 신념이란 무엇인가를 되짚게 만든다.

공개 직후, <아수라>와 <신세계>를 필두로 이정재와 정우성의 필모그래피 속 여러 영화들이 소환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정재 감독은 그 작품들엔 없던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 넣으려 노력한다. 40년 전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명백한 한계와 무게 말이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각기 군과 안기부에서 오래 몸담으며 사회가 인정하는 애국자로 살아왔던 인물들이다. 둘이 공통의 목표로 달려가는 순간, 이 둘 모두 자신들이 몸바쳐온 신념의 늪에 빠져 버린다. 주변 인물들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남북 평화와 독재의 사슬을 끊기 위한 목숨을 걸은 시도 자체가 남북 분단의 한계에서 오는 예상치 못했던 딜레마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다. 40년 후 우리는 알고 있고, 박평호와 김정도, 두 애국자는 몰랐던 것. 지옥도라고 표현한 건 그래서다. 그 딜레마를 몸소 웅변하는 박평호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아니 알고서도 뛰어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장르적인 결말까지도 완벽하다.

<헌트> 속 독재자는 지금 가고 없다. 영화가 남기는 잔향을 더하는 것은 그렇게 영화 밖 현실이 일차원적으로 중첩될 때가 아니다. 40년여 전 그때 그 애국자들의 신념이, 딜레마가 현재와 직결되지도 않는다. 그 신념이, 딜레마가 쉬이 공감할 성질도 아니다.

<헌트>가 던지는 질문의 유의미함은 둘의 같은 듯 다른 신념을 멀찍이 바라보는 현재의 우리가 그 다음 질문을 고민할 때 비로써 완성된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분단 체제는 여전하다. 독재자는 가고 없지만 나쁜 놈과 나쁜 놈들의 싸움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르지 않다 느낄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스스로 나쁜 놈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다 항변하는 신념의 소유자들이, 그런 애국자들이 여전하다 느낄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어떤 공허함이 밀려왔다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헌트>는 그 신념이란 지옥이 펼쳐내고야 마는 박평호와 김정도의 대립과 대결 구도가 여전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환기시키며 끝이 난다. 결말 자체가 영화적인 봉합에 성공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그리고 질문한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질문 자체가 거시적일 수 있다. 감독마저 고민을 던지는 데 멈춰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10일 개봉해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헌트>의 관건은 이러한 감독의 선택과 질문이 2022년을 사는 우리 관객들의 마음을 얼마나 흔들 수 있는 가다. 이 질문에 답하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아 보인다.  

이를 위해 이정재 감독이 시종일관 장르적이고 영화적인 온갖 장치와 형식을 몰아치듯 쏟아냈을 것이다.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는 동시에 강렬한 형식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기 위해 온힘을 기울인 것도, 설명을 최대한 배제한 채 상황과 장면으로 주제를 웅변한 것도 형식과 주제의 일치를 위함이었을 것이다. 

신파 따위 끼어들 구석이 없는 이 놀라운 데뷔작을, 이정재 감독의 '쿨'함을 응원한다. 개인적으로, 12년 안기부에서 복무했다는 박평호와 군인 시절 김정도의 전사가 보고 싶어졌을 만큼. 
헌트 이정재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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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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