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CJ ENM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스물두 살의 싱글맘이 혼자 딸아이를 키우다 결국 아이를 보호 기관에 빼앗기는 슬픈 이야기다. 딸이 여섯 살인 걸로 보아 엄마는 어린 나이에 출산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가족은 달랑 두 모녀로 단출하지만, 그나마도 몸 누일 곳이 마땅치 않아 모텔을 집 삼아 살아간다. 이 모텔을 관리하는 매니저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다. 융통성 있게 모녀의 사정을 살펴 주기도 하고, 종종 어린 딸의 친구도 되어준다. 하지만 딱 여기까지다.
엄마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노력하지만, 직업을 구하기 힘들고 빡빡한 정부 보조로는 두 모녀가 살아가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엄마는 곤궁한 형편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성매매에 이르고 발각되어 딸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이쯤 되면 사람 좋은 아저씨도 다 소용없다. 아무도 절박한 모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비정한가?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의 '아저씨들'이 어린 여자를 구원한다는 서사는 아름답다고 믿어지지만 허구이며, 아름답다고 믿어지는 가치 또한 되짚어 보아야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다룬 빈곤한 싱글맘 모녀의 현실이 모든 싱글맘 모녀의 삶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일부의 진실을 담고 있다. 영화는 가난해도 모녀의 사랑은 지극하고, 엄마뿐 아니라 어린 딸도 모녀 관계를 돌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모녀는, 비록 엄마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성매매에 나섰고 아이 또한 그 나이 또래 아이보다 영악하지만, 아무런 결격이 없다. 영화는 이런 가족을 정부가 개입해 해체시킬 권리가 있는지 되묻는 방식을 취한다. 문제의 해결은 싱글맘 모녀에게 부과되는 동정적, 간헐적 시혜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떳떳이 살아갈 삶의 조건을 어떻게 구성해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있어야 한다고 성찰하게 한다.
하지만 <브로커>는 이런 질문을 미끄러뜨리고, 아기를 팔아넘기는 범죄자들의 선의에 그 고민과 책임을 넘긴다. 아이를 빼돌려 팔아넘기는 범죄자들도 인간적인 면이 있고, 이들의 뜬금없는 인류애가 아기 엄마와 아기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으라 한다. 마치 그들이 지금껏 팔아 온 아이들이 모두 사랑받고 살고 있기라도 한 듯 말이다.
철저한 검증을 거쳐 진행된 입양이어도 파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범죄자 브로커가 팔아버린 아기의 운명은 입에 담기도 미안할 지경이다. 영화는 이들의 거짓과 모순을 덮고, 소영을 아기를 버리려는 철없는 엄마로, 아기 매매범들을 좋은 부모를 찾아주려는 선량한 아저씨들로 위치시킨다. 비윤리적인 아기 거래 과정에서, "태어나줘서 고맙다"라는 축복의 메시지를 서로를 향해 그러나 종당엔 버려진 아기들을 향해 던지고 있는 얄팍한 위로는 너무나 기만적이지 않은가.
왜 그녀들의 입을 통해 임신·출산을 단죄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