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니얼굴> 스틸
영화사 진진
카메라는 2017년 3월,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출발한다. 북한강변의 물가 바로 옆으로 무려 1km가 넘게 이어진 프리마켓의 운치는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 풍경에 관객이 넋을 놓을 즈음 은혜 씨가 등장한다. 은혜 씨는 프리마켓 셀러의 당당한 일원으로 즉석 초상화인 캐리커처를 그려서 판매한다. 수요자의 사진을 찍은 뒤 즉석에서 포토 프린터로 출력해 그걸 보면서 그림을 완성해 판매한다. 의뢰인은 마켓 한 바퀴 돌거나 밥 한 끼 먹고 돌아오면 캐리커처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수많은 판매자 중에서 장애를 가진 것 외에 특별한 게 뭐가 있을까 (드라마 공개 전까지는) 궁금해 했을 이들에게 영화는 은혜 씨의 사연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과정을 거친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발달장애인 (1990년생) 은혜 씨는 27살이 되기까지 스스로 돈을 벌거나 사회생활을 해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99%의 발달장애인은 비슷한 과정을 겪을 테다. 하지만 일러스트 작업을 하는 어머니 장차현실의 화실에서 알바를 하던 은혜 씨는 자신의 소질을 발견한다. 그리고 지역 사회복지관에서 계약직 일자리도 얻는다. 졸지에 '투잡'을 뛰는 능력자가 된 셈이다. 은혜 씨는 주중에는 복지관, 주말에는 문호리 리버마켓 셀러로 활동하면서 생애 최초로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활약할 기회를 얻는다.
카메라는 그런 은혜 씨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최대한 다양한 각도에서 풍부한 표정을 담아내려 애쓴다. 그렇게 정성을 기울인 카메라 프레임 속 은혜 씨가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그녀의 지루하고 정체되었던 삶이 갑자기 바빠지고 해결해야 할 숙제가 쏟아진다. 그런 급격한 변화가 힘겹고 부담스럽지만 은혜 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포기할 수 없다. 영화는 이 순간,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존재에서 자기주장이 또렷한, 까칠한 은혜 씨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은혜 씨는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와 활동지원사의 도움을 받아가며 일한다. 그렇지만 한 명의 작가로서 자기 작업에 대한 과도한 개입이나 훈수에는 명확하게 의사표시를 한다. 자꾸 간섭하지 말라고. 그 순간 은혜 씨의 표정과 말투는 더없이 단호하다. 본인부터 유명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장차현실 작가는 순간순간 자꾸 은혜 씨의 그림에 첨삭하려다 거센 저항에 부딪히곤 한다. 그리고 이내 인정한다. 정은혜 작가는 우리와는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있구나 하는 사실 말이다. 어느덧 영화 속에서 은혜 씨가 그린 캐리커처는 1천명 단위를 훌쩍 넘어선다.
이제 은혜 씨는 인기 때문에 늘어난 작업량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책임감 때문에 점점 작업 속도는 빨라지고 어떻게 하면 더 잘 그릴까 효율을 고려하며 끙끙 앓기도 한다. 연차가 쌓이면서 같은 인물이 두 번 세 번 기념 삼아 재의뢰하는 초상화 구상에 심각해진다. 일감이 늘어나면 실무도 늘어나게 마련이다. 마켓에서 간혹 직면하는 혼자만의 순간에도 은혜 씨는 쩔쩔매곤 했지만 이제 계산과 진열을 혼자서도 도맡을 수 있다. 그렇게 진땀 빼가며 챙겨야할 몫의 일이 늘어만 간다.
하지만 자신이 번 돈으로 마켓에 매번 자율기부를 하는 순간에는 비로소 이 공간에서 동등한 주체로 자리를 잡았다는 자부심이 만면에 가득하다. 늘 집, 그나마 장차현실 작가의 학원이나 복지관까지 행동반경이던 (상대적으로 다른 발달장애인들에 비한다면 조금 나은 조건이긴 하지만) 은혜 씨에겐 자기를 위한 세상이 열린 셈이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는 다른 셀러들과의 사교생활에도 열심이다. 장애인의 자립은 그렇게 사회 속에 뛰어드는 것으로서 이룩되는 법이다. 영화는 크게 모가 나는 지점이나 대립 항을 인위적으로 삽입하지 않으면서도 장애인과 주변 가족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는 선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그림으로 전시회를 여는 경지에 이른다. 인물 캐리커처를 넘어 관련 소재를 다룬 교육책자 삽화를 맡았을 때 주위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느꼈을까? 은혜 씨는 과감하게 도전하며 큰일이라고 웃는다. 창작 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선정되기도 한다. 활약은 점점 반경이 넓어진다. 수많은 손님을 만나면서 인연을 만들어간다. 해는 바뀌고 또 지나 어느새 2019년까지 지나왔다.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두 번째 전시와 함께 이제 은혜 씨의 캐리커처 목록에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솝우화 속, 북풍과 태양의 내기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니얼굴>은 영화 형식적으로는 그저 화제성이 있는 감독 본인 가족을 대상으로 삼아 시간 순으로 기록한 연대기 구성 다큐멘터리일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알파이자 오메가, 일이 안 풀리면 짜증을 내거나 토라지기 일쑤이던 은혜 씨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밝아지고 적극적 유형으로 탈바꿈하는 (마치 물이 포도주로 비등점을 경유하는) 순간들은 굳이 극적 사건이나 이중 삼중의 복선이 없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고 훈훈한 느낌으로 관객의 주변에 온기를 전하고 입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영화는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으레 관객이 기대하는 파괴적 갈등이나 감춰진 이면을 굳이 끄집어낼 생각이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하지만 실재하는 내용이기 때문일 테다. 대신 오래 함께 살아온 가족만이 수행할 수 있는 방식, 시간 맞춰 촬영하는 게 아니라 일상의 풍경을 거리감 없이 주인공이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도록 담아내 디테일한 '결정적 순간'들을 기록하는 감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 작품은 표면상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장애인의 이야기를 담은 감동실화 부류에 속할지 모르겠으나, 서동일 감독이 은혜 씨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어떻게 표정을 바꾸게 해주는가에 대한 명백한 관점과 태도에 입각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하의 세상은 경력 차고 넘치는 인재라도 언제든 해고가 가능한 정글의 형상을 띠게 마련이다. 다용도 다기능 인력이 기본 사양이기에 그저 상품 골라 추려내는데 익숙해져버린 세태에서 은혜 씨 같은 존재들은 그저 사회의 잉여라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자각하거나 인지해 숨겨진 역량을 펼친다면, 당사자는 물론 사회의 공공복리에도 부합되는 건설적인 일일테다. 영화는 그렇게 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 은혜 씨의 도전과 변화를 찬찬히 담아내는 것만으로 당사자들에겐 용기와 희망을, 그저 외면해온 우리들에겐 반성과 전환을 조언하는 효과를 발산한다. 저 출산으로 인구 절벽이라는 공허한 비명 이전에 우리가 이미 세상에 태어난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볼 때 아닐까.
물론 <니얼굴>의 모든 게 다 성에 차지는 않는다. 대미를 장식하는 하이라이트 격, 두 번째 전시 장면이 조금 짧아도 좋았으련만 하는 생각이다. 아마 드라마가 화제가 되는 바람에 더 그런 판단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2020년에 공개된 작품이고 이때만 해도 은혜 씨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다. 감독은 가족의 심정으로 은혜 씨가 행복하게 웃고 춤추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을 테다. (드라마 방영 전까지는) 딸의 생애 가장 기념할 만한 날이니 굳이 까다로운 비평보다는 그저 씩 웃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는 대목이긴 한다.
영화는 밝고 화사한 톤을 일관되게 고수한다. 형식상으론 약간의 시련과 고통을 전달하면서도 방송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가족 드라마 얼개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법론이 친근하게 다가올 뿐 장애문제에 대한 감독과 가족의 입장은 온정적 대처를 원하는 타협이나 소재주의 활용과는 아득히 떨어져 있다. 서동일 감독과 장차현실 작가가 장애인 가족으로서 입법이나 정책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실천 활동에 나서온 것을 아는 이들이라면 별 이견을 제기하지 않을 테다. 무엇보다 <니얼굴>은 한 명의 사회구성원이자 '인간'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씩 자립을 위한 숙제를 풀기 시작한 은혜 씨의 표정변화를 관찰하는 체험이다.
이제는 드라마 덕분에 많은 이들이 은혜 씨의 얼굴을 안다. 감명 깊게 드라마를 본 이들의 수많은 후기와 소감은 공통적으로 우리 사회의 이웃인 장애인 문제를 극중 은혜 씨가 분한 '이영희'의 쌍둥이 동생 '영옥'(한지민 분)이 고백하듯 회피하거나 간과해온 데 대한 반성과 개선의 의지였다. 그런 선의의 관심이 늦깎이 개봉을 앞둔 영화에는 큰 힘이 되어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빛나는 갑옷을 차려입지 않더라도 <니얼굴> 속 은혜 씨는 그곳에서 충분히 빛나고 있다.
또 하나의 <니얼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