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특집 다큐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연출한 김무성(좌), 조나영(우) PD
이영광
- 지난 18일 방송된 5.18 특집 다큐 < 3공수 42년 만의 증언록 > 제작하셨잖아요. 방송 끝났는데 어떠세요?
김무성 PD(아래 김): "오랫동안 준비했던 작업이어서 끝나니까 무사히 끝냈다는 시원함도 있어요. 하지만 시신이라든지 행불자들을 결국 못 찾았고 과제로 남아서 그게 아쉽기도 하고 또 걱정도 되죠. 걱정은 증언해 준 계엄군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예요."
조나영 PD(아래 조): "저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이 많이 무거워졌어요. 진실 규명에 대해서 우리가 해야 될 것들, 들어야 될 것들 알아야 될 것들이 많아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출연자들에 대한 걱정도 커요. 그분들은 좋은 마음으로 용기 내서 증언해 주신 건데 그 부분으로 인해 이분들이 피해 입지 않으실까란 생각이 들어서 걱정도 되죠."
- 3공수 여단 군인 5명의 증언을 토대로 다큐 제작하셨잖아요. 어떻게 제작하게 되셨어요?
김: "2020년 가을부터 준비한 건데요. 저희 KBS 광주총국 같은 경우 5.18을 계속 다루는 PD들이 있어요. 지금까지는 주로 계속 피해자 위주의 역사 발굴이었는데 40년이 지났잖아요. 그래서 가해자 얘기도 필요하지 않냐는 거예요. 이유는 역사적으로 사실을 규정하려면 한쪽의 입장만 가지고 얘기할 수 없죠. 근데 다른 지역에서 계엄군 얘기를 하는 건 조심스러울 것 같았어요. 피해 지역인 광주에서 먼저 계엄군의 얘기를 하는 게 더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접촉했었고 다행스럽게도 5.18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계엄군 전수조사를 들어갔어요, 저희가 계속 요청하고 설득해서 2020년부터 계엄군들 만나러 다녔어요."
- 광주에 투입된 3공수가 집단학살과 암매장에 당사자이자 목격자라고 나오던데 3공수는 어떤 일을 했길래 중요한 건가요?
김: "광주에 3공수, 7공수, 11공수가 왔는데 3공수는 가장 진압에 최적화된 부대예요. 3공수는 부마항쟁도 진압했던 부대예요. 3공수는 초기 가장 치열했던 광주역 시위에 있었고 그다음 5.18 항쟁의 시작이라는 전남대에 주둔했고 가장 은폐된 공간인 교도소에 있었거든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데죠. 그래서 그들의 움직임이 가려져 있었고 중요한 위치에 있었어요."
- 42년이 지났는데 왜 이제 와서 얘기할까요? 그들도 5·18 이후 힘들었던 것 같은데 좀 더 빨리 얘기했으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김: "이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여러 가지가 복합적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20대의 젊은 사람들이었거든요. 1990년대, 2000년대 초반은 가장으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상황이고 지금은 아이들도 키웠고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는 시기가 되면서부터 증언해야겠다는 용기들이 생기는 것 같아요. 또 하나는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계엄군 전수조사를 시작했거든요. 그런 시기들이 좀 맞물렸지 않나 하죠."
- 최초 발포가 3공수라고 나오던데 그럼 3공수가 발포하기 전엔 발포가 없었나요?
김: "집단 발포는 20일 저녁에 광주역에서 있는 게 맞고 발포는 19일에 이미 이루어졌어요. 19일 계림동 광주고 앞쪽에서 4시 50분 5시쯤에 발포가 있었었고 그 일대에서 총상으로 한 4분 정도가 부상을 당한 피해자 증언들은 있어요."
- 그건 누가 한 건가요?
김: "그 지역에 있었던 게 11공수예요. 3공수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죠. 19일 자정쯤에 전대 앞에서 총이 스쳐가지고 열창 총상을 입었다고 신고를 한 게 있어요. 그런데 이 기록들은 19일 총살당했다는 피해자 증언만 있는 상황인 거죠. 아직 군 문서나 계엄군의 증언을 통해서 퍼즐이 딱 맞춰지지는 않았어요."
- 3공수 다섯 분이 증언하셨잖아요.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김: "2020년 가을 즈음부터 돌아다녔잖아요. 여러 분 만나서 계속 설득했죠. 계엄군은 두 부류인데 하나는 아직도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고 한편으론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주로 인터뷰 저희를 만나주는 분들은 이런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분들이에요. 이분들을 만났는데 가장 그분들이 공감하는 건 뭐냐면 '지금 공식적으로 행불자가 70몇 명이다. 신고된 것만 200케이스가 넘는다. 유골 찾아서 가족들한테 돌려라도 줘야 될 거 아니냐'라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그거를 어필했었고 저희가 방송에 출연을 유도할 때는 '최초로 집단 증언을 하자. 집단 증언을 해서 조각을 맞춰서 그걸 보고 좀 더 많은 계엄군이 증언에 나설 수 있게 하자'라고 했죠. 거기에 동의하신 분들이 저희 스튜디오에 나왔던 5명이고 개인적으로 만나서 인터뷰를 딴 분이 또 한 두 분 계시거든요. 그래서 한 7명 정도가 저희 인터뷰에 응해 주셨죠."
- 처음에 증언해 달라고 했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김: "저 어렸을 때 했던 만화영화 <똘이 장군> 보면 북한을 괴뢰군이라고 부르고 돼지 늑대로 병사를 비유했잖아요. 저한테는 계엄군이 <똘이 장군> 같았죠. 그래서 제가 속된 말로 쫀 거예요. 제가 너무 조심스럽게 말하니까 계엄군이 '왜 이렇게 네가 더 긴장했냐? 편안하게 말하라'고 해요. 그때는 제가 찍는 것도 아니니까 '저는 사실 광주에서 나고 자라서 여차여차 했다'라고 말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고 그런 게 뭐 있냐고 편하게 물어보라'라고 오히려 저를 다독였었어요. 그리고 최명룡씨 같은 경우는 제가 만났을 때 얼굴 가리고 음성 변조해서 인터뷰까지만 해주신다고 했거든요. 근데 그걸 조나영 PD가 설득한 거죠."
발포 명령 계속 추적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