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홍천기>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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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이유로 인해 귀신이나 악령에 집착한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중종실록>에 나온다. 세조의 3대손인 중종과 당시 왕실 사람들이 걱정한 것 중 하나는 세자 이호의 안전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걱정한 사람은 중종의 어머니이자 세자의 할머니인 정현왕후 윤씨(1462~1530년)다.
정현왕후는 중종 10년 2월 25일(1515년 3월 10일) 27세 된 아들 중종이 장남 이호를 얻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 일은 정현왕후에게 특별한 기쁨이 됐다. 이호의 어머니인 장경왕후는 시어머니 정현왕후와 한 집안인 파평 윤씨였다. 그래서 정현왕후가 볼 때, 이호의 출생은 친정의 피를 물려받은 손자가 차기 군주가 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쁨을 감소시키는 일이 곧바로 일어났다. 엿새 뒤에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왕자가 왕위를 물려받기까지 겪게 될 고난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호에 대한 정현왕후의 염려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현왕후를 불안케 하는 일이 중종 22년에 발생했다. 12세 된 세자 이호의 신변을 위협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중종 22년 2월 25일(1527년 3월 26일) 및 3월 1일(4월 1일) 발생한 '작서(灼鼠)의 변'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불에 지져진 쥐가 사지와 꼬리가 잘린 채 세자궁의 은행나무에 걸려 있었던 사건이다.
세자에 대한 저주를 표시하는 이 사건에 놀란 정현왕후는 후궁 박경빈(경빈 박씨)을 의심했다. 이는 박경빈과 복성군 모자가 동년 4월 21일(양력 5월 20일) 폐위를 당하는 원인이 됐다. 혐의를 입증할 만한 구체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정현왕후와 왕실 사람들은 박경빈을 범인으로 몰고갔다. 세자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합리적 판단을 하기 힘들었던 왕실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다.
박경빈 모자에게 분풀이를 하기는 했지만 작서의 변으로 인해 심리적 긴장감에 빠져 있었을 왕실 사람들을 또 한번 놀라게 만드는 사건이 음력으로 그해 6월 17일(양력 7월 14일) 발생했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경복궁 숙직실에서 잠자던 나팔수 병사가 가위에 눌려 소리를 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 사건이다.
한밤중에 고함 소리가 들리자 다른 군인들도 덩달아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그들의 눈에 무언가 스치고 지나갔다. 삽살개 같고 망아지만한 물체가 자신들의 방을 급히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시각적으로 충격을 받은 그들의 후각을 자극하는 일이 곧바로 벌어졌다. 괴물체가 빠져나간 그 방에서 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은 경복궁을 일대 소동에 빠트렸다. 괴물체는 궁궐 모퉁이에서도 발견됐다. <중종실록>은 이를 물괴(物怪)로 표기한다.
정현왕후는 이 일을 비과학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래서 불길한 경복궁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 같은 정현왕후의 태도는 궁을 벗어나 민간에까지 유언비어가 퍼지는 원인이 됐다. 괴물의 실체를 놓고 온갖 설이 난무하게 됐던 것이다.
이때 신하들이 건의한 내용을 살펴보면, 신하들의 눈에 왕실 사람들이 얼마나 비과학적으로 비쳤는지 느낄 수 있다. 중종 22년 7월 13일자(1527년 8월 9일자) <중종실록>에 실린 홍문관 부제학 박윤경 등의 상소문에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천하에는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데도 사람 자신이 어지러움으로 인도합니다. 사물의 이치에는 본래 괴이할 게 없는데도 사람 자신이 괴이함에 이르게 됩니다.
왕실 사람들이 물괴 사건을 비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된 원인이 심리적 측면에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이다. 불필요한 일로 동요하지 마시라는 게 상소문의 요지다. 이런 소동이 반드시 심리적 원인 때문에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당시의 신하들은 왕실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인식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실이라는 집단의 생태적 한계
일반인보다 왕실 사람들이 형이상학적 사고에 빠지는 일이 더 많았던 것은 왕실이라는 집단의 태생적 한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간에 왕실은 스스로를 천명의 대리인으로 자처했다. 자신들이 하늘의 명을 받아 지상을 다스린다고 주장한 것이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제정일치시대에는 군주인지 샤먼인지 구분하기 힘든 임금도 많았다. 신라의 두 번째 임금은 남해차차웅으로 불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차차웅은 무당을 뜻하는 글자에서 발전한 용어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된 훗날에도 군주와 제사장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조선시대까지도 군주는 왕실 사당인 종묘에서 제사를 주관했다. 이곳에서 최대의 종교 행사를 주관했으므로, 조선시대 군주 역시 어느 면에서는 제사장이었다.
이렇게 왕조국가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를 바탕으로 왕실이 정치적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왕실 사람들은 종교적 사고를 할 기회가 일반인보다 많을 수밖에 없었다. 왕실 사람들도 유교 경전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이라 자처해야 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사고와 거리를 두기도 쉽지 않았다.
마왕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 마왕을 그림 속에 가둘 수 있다고 믿는 드라마 <홍천기> 속의 왕실 사람들처럼은 아닐지라도, 조선시대 왕실 역시 신비한 사고에 상당히 많이 갇혀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로부터 "사물의 이치에는 본래 괴이할 게 없는데도 사람 자신이 괴이함에 이르게 됩니다"라는 우회적인 충고를 들을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