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여리하고 순해빠졌서 남자들 앞에는 지나가지도 못하던 내가 웬 용기가 났는지, 나도 모르겠어.'

초경도 미처 시작하지 않은 소녀였다. 이제 여든 아홉이 된 소녀는 지금까지도 '0995686'란 군번을 또렷이 기억한다. 소녀는 어떤 이유에서 여군을 택했을까? 그리고 그런 선택을 했던 소녀는 왜 그 뒤로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이 '여군'이었음을 함구했을까? 

남자들 셋이 모이면 군대 얘기로 밤이 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군대 이야기는 대개 무용담으로 점철된다. 하물며 훈장까지 받았다면 자랑거리가 오죽 많을까? 그런데 굳게 입을 다문 분들이 있다. 올해로 71주년을 맞이한 6.25, 그 전쟁통에 여군이, '여자 학도 의용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71년이 지났는데도 생소한 이 이야기를 현충일이었던 지난 6일 KBS1에서 '6.25 71주년 특집 프로그램'으로 다뤘다. 바로 <연순, 기숙>이 그 주인공이다.

71년 전 그날,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연순, 기숙

연순, 기숙 ⓒ kbs1


<연순, 기숙>은 정기숙씨와 송연순씨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겐 생소한 6.25 전쟁 참전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전쟁 발발 2개월여 뒤, 여자 의용군 1기를 모집했다. 대상은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여성들이었다. 이를 계기로 군번 없는 학도병을 포함하여 2만4000명의 여성들이 6.25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송연순씨 기억은 서울 수복에서 시작된다. 다시 등교를 시작한 어느 날 학교로 장교 2명이 왔다. 남자들로는 손이 부족하다면서 여성들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강력한 설득에 그 자리에서 시험을 봐서 군인이 되었다. 연순씨는 또래 여고생들 중에서도 체격이 작아 아직 초경도 시작하지 않았던 데다 수줍음도 많았다. 그런 연순씨가 놀라운 결정을 한 것이다. 원래 선생님이 꿈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군인이 되었다. 

12월 서울 훈련소에 입소했다. 여군들은 이른바 삐딱하게 쓰는 '헬로 모자'를 썼다. 하지만 훈련은 남자들과 똑같이 받았다.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훈련소 과정은 17일 만에 막을 내리고 인천으로 배치를 받았다. 연순씨는 처음으로 본 거대한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는 이듬해 4월 장도영 사단장실에 배치되어 본격적인 군생활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모든 것을 구두로 보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이 송연순씨의 첫 임무였다. 1년 동안 그는 시체는 물론, 팔 다리가 잘려 나가도 자른 나무에 의지해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 등 전쟁의 민낯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군번조차 지급되지 않았던 '학도의용군' 정기숙씨의 경험은 더욱 참혹했다. 성악가를 꿈꾸던 춘천여고 1학년생 기숙씨는 책가방에 교과서를 챙겨서 피난을 떠나던 모범생이었다. 그는 방공호에 숨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국가를 들으며 나라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던 순수한 청년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던 해 10월, 강원도에서도 학도의용군을 모집했다. 당시 같은 반 학생 중 기숙씨를 포함해 노래 잘하는 사람 4명이 차출됐다. 학생들은 당시 춘천 방송국 아나운서 2명과 함께 수복된 곳을 돌아다니며 통일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부르는 등 정훈 활동을 담당했다. 

기숙씨는 6사단 7연대를 따라 10월 압록강에 이르렀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상황이 급변해 고립되는 상황에 빠졌다. 결국 밤 시간을 이용하여 산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가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골짜기를 지날 때 꽹과리 소리에 나팔 소리가 들리고 양 쪽 산에서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다. 앞 사람이 쓰러지고 뒷사람이 쓰러지고... 자신이 몸을 숨긴 바로 위로 중공군이 지나가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그는 '나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연순, 기숙

연순, 기숙 ⓒ kbs1

 
평생 함구한 이유

1953년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다. 여군들은 제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20살의 연순 씨는 평범한 여자로 돌아왔다. 영어를 열심히 배웠던 연순씨는 미군 부대 통역관 자리를 제안 받았다. 그는 다시 군대로 출근을 시작했다. 

통역도 하고 타이핑도 하던 그녀에게 호감을 느낀 한 남성이 다가왔고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여군 경력이 흠이 되었다. 시가에선 여자가 군대에 다녀왔다며 '기가 세다'며 꺼려했다. 

결혼을 한 그녀는 부대에서 찍은 사진마저 다 없앴다. 그저 동료들과의 사진이었지만 누군가의 눈엔 혹 '놀아난 것'처럼 보일까봐 싶어서였다. 하사로 제대한 연순씨의 군생활은 그렇게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연순씨 만이 아니다. 방송 촬영이 시작된 뒤 연순씨는 뒤늦게 동기 곽복순씨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뜨고 없었다. 복순씨의 자녀들 역시 그녀에게 훈장이 수여되고 나서야 자신들의 어머니가 6.25 전쟁에 참전했단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연순씨, 복순씨 등 많은 여성들이 6.25 전쟁에 참전하고서도 당시 사회적 인식 때문에 자신들의 '공적'을 숨기며 살아가야만 했다. 

기숙씨의 자녀들 역시 방송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학도의용군었음을 알게되었다. 기숙씨 역시 50년 넘게 자신이 의용군이었단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얼마 전 모교인 춘천 여고에 세워진 학도의용군 기념비를 자녀들과 돌아본 기숙씨의 감회는 남다르다. 

기념비엔 6.25 전쟁에 참전한 학생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기숙씨의 이름 아래 있었던 학우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기숙씨의 가슴엔 돌아오지 못한 친구들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사선을 넘던 시간, 정훈부 대장과 함께 했던 아나운서들이 헬리콥터로 먼저 구조되었다. 그들은 기숙씨 일행에게 '내일 와서 데리고 가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습격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기숙씨와 또 다른 친구만 구출되었다. 나머지 2명의 친구들은 소식이 없었다. 지금도 친구들 얼굴이 생각난다는 기숙씨는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고 되뇐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5252-jh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연순, 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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