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드라마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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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날짜 <인조실록>에 폐옹주가 거론된 것은 그의 결혼 문제 때문이다. 이 기록에는 부모가 아닌 외삼촌의 보호 속에 성장한 옹주의 결혼을 지원하고자 옹주의 4촌인 인조 임금이 혼수 비용의 지급을 명령하는 대목이 나온다. 광해군이 쫓겨난 지 20년 뒤에야 결혼 문제가 논의됐던 것이다.
옹주의 어머니인 윤소의는 광해군이 실각된 지 이틀 뒤인 인조 1년 3월 14일(1623년 4월 13일)에 처형을 당했다. 이 날짜 <광해군일기>는 "광해의 궁인들을 처형(원문은 誅)했다"면서 "윤씨는 더러운 행동을 이유로 사사(賜死)시켰다"고 말한다.
더러울 예(穢)가 들어간 예행(穢行)을 이유로 사약을 내린 점을 볼 때, 성적 스캔들이나 그 정도 수준의 문제점이 윤씨 사형의 명분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쿠데타 이틀 뒤에 사형을 집행한 점을 보면, 광해군의 측근이라는 점이 실질적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광해군은 돌아올 수 없는 유배를 떠나고 어머니 윤씨는 사형을 당했으니, 이때부터 옹주는 사실상 천애고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를 외가 식구들과 왕실이 보살폈다. 위 <인조실록>에 따르면, 외삼촌이 옹주를 보호하고 왕실이 생활비를 공급했다고 한다. 이렇게 살았던 옹주의 결혼이 1643년에 추진됐던 것이다.
인조 쿠데타 당시 만 4세였던 옹주
드라마 <보쌈> 속의 옹주는 아버지 광해군이 임금 자리에 있을 때 결혼했다가 남편을 잃었다. 하지만, 실제의 옹주는 아버지가 자리를 빼앗긴 지 20년 뒤에야 결혼 문제에 직면했다. 광해군이 왕위에 있을 때 결혼 문제가 거론되지 않은 것은 옹주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왕실에서는 갓 태어난 왕족의 태를 보존하고 그 장소에 태실비를 남겼다. 폐옹주의 것으로 추정되는 태실비에 따르면, 옹주가 태어난 날은 명나라 연호로 만력 47년 6월 23일, 서기로는 1619년 8월 2일이었다.
이는 인조 쿠데타 당시의 옹주가 만 4세였음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임금이었을 당시의 옹주의 나이는 '소녀시대'에도 근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 재위기에 결혼했다가 남편을 잃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개연성이 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이 드라마 <보쌈>에서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 거론되던 1643년에 옹주는 만 24세였다. 스무 살만 넘어도 노처녀로 불리던 시절이었으니, 꽤 늦게 결혼을 한 셈이다. 광해군이 눈을 감을 당시에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죽기 직전의 광해군 역시 딸의 결혼 문제를 고민했을 수도 있다.
광해군이 폐위된 지 20년 뒤에, 또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에 폐옹주의 결혼이 거론됐다는 사실은 드라마 <보쌈>의 스토리가 실제 역사와 크게 동떨어짐을 의미한다. 드라마에 허용되는 일반적인 상상의 범위를 벗어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