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드라마 스페셜 <나의 가해자에게>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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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를 마주하자 트라우마가 튀어나와 고통스런 진우는 초월적인 인내심으로 평정심을 찾으려 애쓴다. 하지만 진우의 앞에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다. 담임으로 배정받은 진우 학급에는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녀 희진(우다비)이 있다. 희진은 진우의 트라우마를 알아채고 거절하기 힘든 거래를 제안해 온다.
조부의 '빽'을 두른 교내 최고 무법자 희진은, 단지 '재미'를 위해 '왕따'로 지정한 한 아이를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괴롭혀왔다. 교육부가 발표한 '2020 학교폭력 실태 전수조사'를 보면, 가해 이유 중 '장난이나 특별한 이유 없이'가 가장 많은데, 드라마에 펼쳐지는 희진의 경악할 수준의 가학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희진이 고른 단지 재미만을 위한 가해의 희생양은 조손 가정의 은서(이연)다.
은서는 오랫동안 학교 폭력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방어막이 돼 줄 부모가 없는 은서에게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녀 희진은 대적할 수 없는 상대다. 싸울 상대가 아니니 대들지 않는다. 자신의 피해에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구조에서 그런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은서의 피해를 감지한 담임 진우가 내막을 캐자, "애매하게 굴지 말고 외면하"라는 은지의 도발적 반응은 이 아이가 처해왔던 고립무원의 지형을 드러낸다.
은서의 고독한 처지는 진우를 과거로 회귀시킨다. 피해를 알렸지만 외면했던 과거의 선생님이 오롯이 떠오르자, 진우는 자신의 교사됨이 그때 그 선생님과 얼마나 다른가, 뼈 아프게 돌아본다. 해서 은서가 진우에게 "도와 주세요 선생님, 안 해봤을 거 같아요?"라며 쏘아붙이는 사나움은 오히려, 그 애가 보낼 수 있는 가장 절박한 SOS 신호임을 알아챈다. 같은 고통을 겪어본 자는 그 고통이 내뿜는 징후적 공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기 때문이다.
희진이 기간제 교사인 진우에게 했던 맹랑한 제안은 정규직 교사로의 전환이었다.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젊은이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희진의 제안에 흔들리는 진우를 손가락질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진우가 희진의 폭력에 타협했다면, 시청자는 깊이 상처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진우는 안정된 미래를 위해 과거의 아픔을 저당잡지 않았다. 그가 어려운 선택을 한 데엔 교사(어른)로서의 책임감이 컸겠지만, 더 근본적인 발로는 피해자의 고통에 그 누구보다 공명했던 연대감이었을 것이다. 피해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피해의식을 연대감으로 승화시킨 진우의 용기 있는 선택은, '학폭 미투'가 연일 터져 나오고 있는 현실에 함의하는 바가 크다.
할머니 상을 치르고 자퇴하러 온 은서에게 진우가 진심을 다해 건네는 말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피해자의 입장을 절실히 대변한다. 자퇴라는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폭력에서 도망치려는 은서에게, 진우는 같은 학교폭력 피해를 겪은 앨라이(연대자)가 되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니가 평생 남아. 계속 괴롭혀." 은서의 피해를 외면하고 싶었던 마음은 어쩌면, 극복되지 못한 고통의 트라우마였음을 진우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는 은서가 자기와 같은 불행한 어른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결기인 것이다.
진우는 어쩌면 가해의 방관자이자 조력자일지도 모르는 교실의 아이들에게 자신 역시 치명적인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음을 용기 있게 증언한다. 여기서 끝내지 않는다면, 희진이 벌인 가해의 증거를 과속방지턱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희진의 폭력의 질주를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직을 건 진우는 아이들에게 희진이 벌인 폭력을 증언해달라고 호소한다. 냉담했던 아이들이 진우에게 마음을 열고 그에게 가해의 증거를 속속 전달하기 시작한다. 두려움을 걷어낸 아이들이 용감한 증인이 되고 있었다. 정교사직을 내던지고 피해자인 은서와 연대하기로 결심한 진우는 은서의 피해를 학교폭력위원회에 회부하는 승부수를 던지며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피해를 회복하는 데에 공동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