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스틸컷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우연히 돈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찾은 중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중만을 시작으로 영화는 각각의 매력을 지닌 주인공들을 한 명씩 비춰주는데, 이들의 관계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지 않으면서 그들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도 자극한다. 이러한 편집은 특정 인물이 등장할 때에 강력한 임팩트를 주면서, 영화의 흡입력을 끌어올린다. 또한 영화는 과거로 되돌아가는 비선형적 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이며, 가방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인지, 돈가방은 왜 찜질방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면서 서스펜스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중만이 돈가방을 찾아서 찜질방 보관실에 옮기는 첫 시퀀스에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돈가방을 향한 악인들 간의 치열하고 비열한 추격전은 이 영화가 선사하려던 재미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중만이 찜질방을 벗어나는 사이에 영화는 사건의 시작과 몇몇 인물의 최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유난히 잘 들리는 뉴스 멘트를 통해 알려주며 굳이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누가 누구를 죽이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왜 죽느냐에 달린 셈이다.
그 이유는 사실 영화의 제목에 이미 답이 나와있다. 제목에 활용된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고 잡는다'는 속담에서 지푸라기는 사실 쓸데없는 것이다. 상황을 바꾸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진짜 잡고 싶은 목적은 아니다. 실제로 지푸라기를 잡아서 물에서 빠져나온다면, 상황을 바꾼다면 그 지푸라기는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수단으로써 일을 다했기 때문이다.
작중 돈가방도 마찬가지다. 영화 속 인물들은 돈가방을 쫓는다. 하지만 그들이 돈가방을 쫓는 진짜 이유, 그들이 진짜로 성취하려는 목적은 돈가방 그 자체가 아니다. 빚에 쫓기는 연희와 태영은 그 돈으로 자유로워지는 게 목표다. 중만은 아버지 가게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목적이며, 미란은 죽을 것 같은 집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진짜 목적을 잃은 채 단지 수단에 불과한 돈가방 그 자체에 목숨을 걸고 덤벼들 뿐이다.
'짐승들'에 대한 두 가지 해석
진정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에 불과한 돈가방이 목적으로 보이는 순간, 그들에게 파멸은 당연한 일이다. 작중 누군가의 손에 들어간 돈가방은 그 순간 목적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뒤 지푸라기를 잡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그렇기에 주인공들이 돈가방을 손에 쥔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사망하는 것은, 그리고 그 돈가방이 단 한 번도 그것을 원하지 않은 이에게 돌아가는 권선징악의 결말은 스토리 흐름상 너무나도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이처럼 장르의 일반적인 관습에서 다소 벗어난 내러티브를 들려주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캐릭터를 구축할 때도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피카레스크 장르는 악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때문에 그들을 철저히 플롯의 도구로 삼거나, 주인공에게만 공감의 여지를 남기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각각의 캐릭터가 그들이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