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담장. 사진 속의 대문은 광화문.
김종성
정조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궐 밖 밀행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강심장을 갖지 않고서는 섣불리 시도할 수 없었다. 왕족이 정당한 사유 없이 궁을 나가는 것이 탈선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궁궐 경비가 매우 삼엄했다. 그것 때문에도 섣불리 밀행을 시도할 수 없었다. 삼엄한 경비 때문에라도 밀행이 힘들다는 것을 절감한 두 사람이 있다. 13대 대통령인 노태우씨와 부인 김옥숙씨다. 대통령 취임식 7일 뒤인 1988년 3월 3일 정월대보름날 밤중에 이 부부가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다가 시도했던 일이 <노태우 회고록> 하권에 소개돼 있다.
"오랫만에 복잡한 정사(政事)도 잊은 채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며 울창한 숲과 벗이 되어 거닐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철책이 눈앞에 다가왔다. 순간, 우리가 갇혀 있는 몸이라는 생각이 들자 답답하기만 했다. 철책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중략)
과거 청와대 경호실 근무를 해본 경험이 있는 나는, 철책에 근무하는 경비병 사이의 거리가 얼마쯤 되는지 알고 있었다. 청와대 서편에 있는 길을 이용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 아내의 손을 잡고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그런데 철책을 따라 50m쯤 걸었을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부속실에 있는 당직 비서관이 플래시를 들고 우리 뒤를 밟고 있었다."
당황한 대통령 부부에게 비서관은 "5분마다 각하 내외분의 위치를 보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나는 속으로 '탈출은 불가능하구나' 생각하고 '여보, 안 되겠소. 포기합시다' 하고 말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노씨는 '청와대 탈출 미수'로 명명한 그 일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회고록에 남겼지만, 옛날 왕들 같으면 섣불리 시도하기도 힘들었고 어쩌다 성공했다 해도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로 갖고 있어야 했다. 세상에 알려지면, 심각한 비행으로 인식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가 궁을 떠나는 건, 비정상적 일로 인식돼
고대로 가면 갈수록 군주는 사제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종교와 정치가 혼합된 제정일치 시대를 벗어나, 양자가 분업화된 제정분리 시대로 들어선 뒤에도 어느 정도는 그랬다. 이때도 왕은 여전히 하늘의 대리인으로 간주됐다. 불과 109년 전인 1910년까지도 이 땅의 지도자는 천(天)의 대리인으로 인식됐다. 종묘에서 거행된 국가 최대의 종교 의례를 주관한 이도 바로 그였다.
그랬기 때문에 군주는 신성한 수행자의 면모를 함께 띨 수밖에 없었다. 유교철학 즉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문신들은 하루에 두세 번 열리는 경연이란 세미나를 통해 군주에게 수행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신적 수행을 강조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군주의 신성성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군주가 수행자의 면모를 겸비했기 때문에, 그가 거처하는 궁궐도 통치 공간에 더해 수행 공간의 이미지를 띨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가 합당한 이유 없이 수행 공간인 궁을 떠나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수행자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로 인식됐다.
수도사가 수도원에서 몰래 빠져나오거나 승려가 사찰을 은밀히 벗어나는 게 이상하게 비쳐질 수밖에 없듯이, 왕족이 정당한 사유 없이 궁을 나오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심각한 불이익을 각오하지 않고는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경우에도, 아버지 영조 몰래 평안도에 다녀온 게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이 됐다. <한중록>에서는 영조가 아들의 궐 밖 여행을 뒤늦게 파악한 일을 소개하면서 "그때 한바탕 풍파를 겪었"다고 말했다.
궁을 벗어나는 일을 함부로 상상할 수 없었던 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