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포드의 아내들은 한결같이 아름답게 미소짓는다.
드림웍스
반면, 남자들은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산다. 여성들이 가정을 돌보는 사이 남편들은 '남성협회'에서 게임과 오락을 즐기며 자기들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들의 대화 속에는 여성, 즉 자신의 와이프를 소유물로 간주하는 시선이 다분하다. 그들은 와이프를 얼마나 자신 마음대로 조정하는지를 과시하며 여흥을 즐긴다. 흔히 말하는 폭력적인 장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이때부터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알았다. 끔찍한 가정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이 영화가 떠오른 이유를 말이다.
영화 속 여성들은 스텝포드에 오기 전 모두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자신만의 삶을 사는 여성들이었다. 이런 여성들의 뇌에 센서를 심어 오직 남성에게 순종하는 아내로 만들어버린 영화 속 남성들. 사회적 성취를 중요하게 여겨온 여성들에게 이 같은 삶은 '죽음'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를 '죽여서라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자하는 이 영화 속 남성들의 태도는 아내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하고, 급기야 목숨까지 앗아간 살인범 남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서운 가부장 문화의 흡인력
더 소름끼치는 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부장적 폭력이 엄청난 파급력을 갖는다는 점이었다. 스텝포드에 오기 전 월터는 해고당한 조안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신경쇠약에 걸린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따뜻한 남편이었다. 그런데 이런 월터가 변한다.
남성협회에 다녀온 뒤 월터는 이 마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이야기하는 아내에게 "이 마을은 그 어느 곳보다 멋진 곳"이라며 "그 어두운 분위기의 옷부터 바꿔 입으라"며 아내를 개조하려 든다. 해고로 인해 자존감이 바닥난 조안나는 갑작스레 바뀐 남편의 태도에 겁을 먹고는 스텝포드의 아내들처럼 옷을 차려입고 자신을 바꿔보겠다고 다짐한다. 조안나의 친구이자 작가인 바바라(베트 미들러)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조안나는 "지난 밤 남편이 달라졌어요. 강압적이고 고압적이었어요"라고 말한다. 가부장적 폭력은 그토록 당당하고 힘 있는 여성이었던 조안나마저 주눅 들게 만들었던 것이다.
대도시에서 전통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해갈 수 있었을까. 이는 오래된 가부장적 문화가 여전히 무의식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월터는 아무런 불편 없이 스텝포드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심지어 "이 곳은 마치 삶의 이상향 같다"고까지 말한다. 남성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규정하는 가부장문화를 흡수하는 것은 월터에겐 전혀 어색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일일 테다. 하지만, 조안나에게 이런 변화는 주체적인 나를 포기하고 누군가의 대상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조안나는 어색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조안나는 변해보려고 노력한다. 밝은 옷을 입고, 집안 곳곳을 꼼꼼히 단장하며, 예쁘게 컵케이크를 구우면서 말이다. 도대체 그녀는 왜 자신답지 않음을 알면서도 변화해보려 노력한 걸까. 이는 가부장 사회의 획일적 분위기가 조안나를 압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두가 전통적인 성역할을 따르며 이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곳에서 조안나는 스스로가 '비정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어쩌면 방송인으로서 겪은 자신의 불행이 전통적인 성역할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수 천 년 간 누적되어온 가부장적 집단무의식은 월터와 조안나가 변해가듯, 우리 삶에서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끔찍한 가정폭력과 데이트폭력 사건들, 친밀한 남녀관계에서의 폭력을 여전히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그 폭력의 원인을 여성에게서 찾는 시선들이 그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