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몸을 닮은 밤의 능선을 따라 그녀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보네. 나의 몸을 닮은 밤의 곡선을 따라 그녀가 걸었던 그 길을 걸어가네." - '그녀가 걸었던 길' 중에서

2016년 1월과 2월은 박혜리에게 의미가 깊은 달이다. 에스닉 퓨전밴드 '두번째달'을 거쳐 아이리쉬 밴드 '바드'에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선보여 왔던 그녀는 지난 1월에 아코디언과 피아노 소리에 온전히 자신만의 감성과 목소리를 담은 첫 솔로 음반 <세상의 겨울>을 발표했고, 이듬달에는 음반 작업 동안 늘 배 속에서 함께 한 첫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웃는 시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저를 보고 숨이 넘어갈 정도로 좋아하면서 웃는 거예요.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어요. 제가 아이에게 사랑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제가 아이에게 무조건 사랑을 주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내가 굉장히 사랑을 받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해주었어요.

세상에는 완벽한 게 없잖아요? 나이가 들수록 확신보다는 물음표가 커지는 것 같거든요. 그게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투성이인 이 세계에서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제 아기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버스킹을 하며 전국을 떠돌던 이십대를 지나 아이와 매일매일 눈을 맞추고 서로의 감정에 반응하면서 모성애를 알아가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박혜리를 지난 7월 7일 합정동에서 만났다. 그는 편한 마음으로 곧 발매될 바드의 세 번째 정규 음반 마무리 작업 중이었다.

"바드 음반에는 굉장히 신나는 음악이 많거든요. 듣는 이들이 무장해제 되는, 남녀노소 누구나 들어도 원초적 흥을 깨워주는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나를 견디기 힘들 때

 인터뷰에 응해준 박혜리. 그녀의 음악 세계에 대해 들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인터뷰에 응해준 박혜리. 그녀의 음악 세계에 대해 들어볼 수 있는 기회였다. ⓒ 김광섭


- 음반 제목을 <세상의 겨울>로 지은 이유가 있을까요?
"그 당시, 날이 추워지면서 사회 분위기와 세상이 냉혹하고 차갑게 느껴졌어요. 그 안에서 사는 저 또한 무기력했고요. '세상의 겨울'은 제가 저를 견디기 힘들어서 만들었던 곡이거든요. 힘든 분들이 많으신데 다 같이 느끼는 부분들이 아닐까 해요. 주된 사운드가 아코디언과 피아노로 이루어져 있어서 겨울과 어울리는 음악 같아요. 음반을 전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겠다 싶어서 음반 제목을 세상의 겨울로 지었어요."

- 아이에게도 음악을 들려주었나요?
"정말 많이 들었죠. 늘 배가 부른 상태로 믹싱 등을 하러 왔다 갔다 음반 작업을 했으니까요. 신기하게도 아이가 울 때, <세상의 겨울>을 들려주면 조용해지는 것 같아요. 희한하더라고요. 아마 익숙한 음악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 '위로하는 법을 잊은 이에게 건네는 작은 노래' 음반의 소개 글귀가 눈에 들어와요. 박혜리가 생각하는 위로는 어떤 모습일까요?
"위로라는 것은 손에 잡히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든 친구에게 무조건 '잘 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이런 말들은 결국은 맞는 말이지만 당장 절망과 고통에 빠진 사람에겐 그처럼 공허하고 무책임한 말도 없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한번 만나서 그의 등을 쓸어주는 게 더 유효하지 않을까요? 그렇다 보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위로를 건넨다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말이에요. 사람은 한없이 외로운 섬 같잖아요? 누구도 내 마음을 다 알지 못하고, 아무리 가까운 가족 간에도 극복하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요.

그런데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절대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어느 순간 저절로 이해되는 경험이 있지 않으세요? (웃음) 노력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사람은 너무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또 비슷하게 살아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음악으로 할 수 있는 위로라는 건 제가 느꼈던 감정들을 충실하고 솔직하게 담아내는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군가는 제 노래를 듣고 '아, 나와 같은 사람이 여기 또 있구나' 느끼는 거죠. 이런 것들이 결국엔 위로, 또는 위로에 최대한 가까운 무엇이 되지 않을까 해요."

- 아코디언 악기는 박혜리의 음악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돌아다니면서 연주하고 싶었어요. 원래 피아노 작곡을 전공했는데 그렇다고 피아노를 들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대안이 아코디언이었어요. 하면 할수록 매력적인 거예요. 연주할 때마다 아코디언이 살아 숨 쉬는 기분이거든요. 사람과 가장 비슷한 것 같고요. 손풍금이라고 하잖아요? 숨을 계속 넣으면서 오른손으로 연주하거든요. 피아노를 칠 때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코디언은 살아있는 것으로 느껴져요. 또 다른 저의 목소리인 것 같아요."

- '몽콕에 내리는 밤 ', '세상의 겨울 ', '작은 창 ' 세 곡의 뮤직비디오 모두 여행지에서 남편 최진성 감독과 함께 촬영한 것으로 알아요.
"남편과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몽콕은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서 갔지만 그 핑계를 삼아서 놀러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있거든요. 기억에 남는 것은 한여름에 지중해로 여행 갔을 때에요. 그리스와 터키도 갔었는데 8월에 가니까 40℃가 되더라고요.(웃음) 산토리니 섬에 들어간 날에는 그리스 전력회사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가 나서 정전이 된 거예요.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를 예약했는데 화장실 물도 안 내려가고 에어컨도 못 트는 극한 체험을 한 게 생각나요.

한겨울에는 북쪽으로 떠났어요. '세상의 겨울'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배경인데, 베이징, 모스크바, 폴란드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핀란드 북극권 서클까지 갔어요. 모스크바에서부터는 오전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3시에 지더라고요. 한겨울 속 그 나라의 분위기를 경험하고 싶었어요. 한겨울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었죠. 피오르드에도 갔는데 저희 둘밖에 없어서 재난 영화 느낌이었죠."

 <세상의 겨울> 앨범 재킷. 그녀의 1집이다.

<세상의 겨울> 앨범 재킷. 그녀의 1집이다. ⓒ 박혜리


- 바드 활동 시, 전국 투어 버스킹 하면서 음반도 직접 팔았죠?
"8년 전인데, 버스킹이 유행할 때가 아니라서 잘 될까 싶었는데 되더라고요. 아직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악은 정해져 있거든요. 그런데 길에서 연주하는 희한한 바드의 음악에 사람들이 반응하더라고요. 편견과 포장 없이 사람들이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우리도 그렇게 다가갔어요. 원래 음악이 이런 모습이구나 생각했죠.

춤추는 사람들부터 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곡을 연주할 때 앞에 둔 상자에 와인과 맥주를 넣어주신 분도 있었고요. 아이들은 장난감을 넣더라고요. 바드의 음악을 듣고 주실 수 있는 최선의 성의를 표시해주셨다고 생각해요. 포장되고 가격이 붙기 전 원래 음악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해요. 음악이 산업화하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 밴드 '두번째달'은 최근 2집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2015)와 국악프로젝트 <판소리 춘향가>(2016)를 발표했어요. 전 멤버로서 기분이 어떤가요?
"<판소리 춘향가>라는 멋있는 음반을 만들어서 너무 좋죠. 음악 좋아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화제거든요. 제가 이처럼 멋있는 팀에서 음악을 처음 시작할 수 있었던 게 너무나 감사하고 뿌듯해요."

선선해졌을 때, 그녀는 돌아올 것이다

-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교회에서 피아노를 쳤거든요. 악보에 있는 것보다는 제가 만들어서 연주하는 것에 익숙했었어요. 그런 재미를 느끼다 보니 자연스럽게 재즈와 팝을 좋아하게 되어 음악을 하게 되었어요. 좋아했던 뮤지션은 '팻 매스니'와 '어떤날'이었어요.

- 당시 어떤 학생이었는지?
"겉으로는 조용하지만 안은 되게 시끄러웠던 사람인 것 같아요.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무서워했는데 20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변했어요. 버스킹 등 음악을 하면서 변한 것도 있고요."

-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참여했어요. 숨은 음악, 숨은 뮤지션을 찾아 들려주는 프로젝트인데, 어떤 경험이었을까요?
"광진교 8번가에서 촬영을 했어요. 발밑으로 투명하게 한강이 흘러가는 게 보이는 곳이었어요. 바드, 정원영밴드 때 다 해봤지만 제 솔로 음반의 공식적인 첫 활동이어서 긴장도 많이 했어요. 잘 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는데 예쁘게 담아주셨던 것 같아요. 존경하는 선배님들이 우정 출연도 해주셨고요."

- 이와 같은 지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네이버를 이용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알려지지 않은, TV에 나오지 않는 음악가를 위한 채널이 있다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죠. 더 확대되면 좋겠어요."

- 숨은 뮤지션이 있다면 추천해주겠어요?
제 친구들은 모두 숨은 뮤지션일 텐데….(웃음) 가야금 연주자 정민아 언니와는 단짝이에요. 올해 연말에 아코디언과 가야금이 함께 한 연주 음반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독특하고 한국적인 음색과 좋은 노랫말을 들려주는 뮤지션이기 때문에 추천하고 싶어요."

- 여름에 듣기 좋은 박혜리의 노래를 추천한다면요?
"들을 거 많아요.(웃음) 우선 '몽콕에 내리는 밤'을 추천하고 싶어요. 홍콩 거리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은 거죠. 왕가위 감독의 영화 <열혈남아>의 원제가 몽콕하문이거든요. 몽콕 거리를 배경으로 만든 건데, 홍콩의 몽콕 거리만큼 여름에 어울리는 거리가 없을 것 같아요. 한여름에 비가 올 때 들으면 좋을 것 같아요. 몽콕에 가보지 않았어도 어렸을 때, 홍콩영화 한 번씩은 봤잖아요? 그때의 느낌들, 느와르적인 약간 축축하고 눅눅한 홍콩을 상상하면서 들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작은 창' 추천해드릴게요. 타이틀곡인데 기타 소리가 여름밤에 어울릴 것 같아요. 두 곡 모두 낮보다는 여름밤에 들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특별히 새 음반을 더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들이 있을까요?
"군인분들이 많이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더운 여름에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지친 일과를 끝내고 들었을 때, 마음에 평화가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어요."

- 위문 공연 요청이 오면 응할 건가요?
"당연히 가야죠. 근데 저를 불러 줄까요?(웃음)"

 박혜리는 경계를 허무는 공연을 추구한다.

박혜리는 경계를 허무는 공연을 추구한다. ⓒ 김광섭


- 8월 계획은 어떤가요?
"우선은 바드 세 번째 정규 음반을 잘 마무리해야죠. 제 공연은 선선해졌을 때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솔로 음반 첫 콘서트가 될 거고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 대화도 하면서 하나요?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해요. 제가 관객들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죠. 제가 좋아하는 것은 선을 긋는 무대가 아닌 경계를 허무는 공연이에요. 단순히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닌 경계 없이 함께 그 시간을 경험하는 공연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에 8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박혜리 바드 두번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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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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