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스틸 컷
넷플릭스
이들의 모국어는 이디시어. 이들 때문에 이디시어(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다. 그 외에도, 드라마 속에서 볼 수 있는 하시드파의 외관, 의복, 결혼 의식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나는 여러 공동체 중, 특히 소외된 공동체를 보여줄 때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르는 만큼, 그들의 문화를 왜곡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야 메인스트림으로 그들의 이슈를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 자고 나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아직은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유대교에 관한 문제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 이슈, 이슬람교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한국에서 마주치기는 어렵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인지 제작진들이 하시드파의 모든 문화들을 살리려고 노력한 문화적 디테일을 엿볼 수가 있다. 에스티가 살아온 뉴욕 윌리엄스버그의 모든 장면을 베를린에서 촬영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어디선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공감되는 경험이기에, 누군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창구로서 이 드라마는 가치 있다.
관전 포인트 2. '세상에 나가 자기 공동체를 찾는 것, 공동체의 의미'
에스티는 대담하다. 항상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을 품던 그녀는 세계와 배타적인 공동체를 떠나 자기 길을 찾는 선택을 한다. 에스티의 선택은 단순히 여성 인권 신장에서 바라볼 수 없다. 더 넓은 관점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베를린'이라는 장소는 에스티가 살아온 집단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겨 준 곳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곳에서 에스티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굴레를 끊어낸다.
위의 사진 속 호수 건너편에는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하자고 논의한 별장이 있다. 에스티는 이 곳에서 어떻게 수영을 하나며,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지만 친구의 " Lake is just a Lake"라는 말을 듣고, 호수에 몸을 담근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공동체를 거스르는 행위를 한 것이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 이곳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과거의 에스티처럼 우리는 '집단 속의 나'로 자신을 규정한다. 학생 신분일 때는 'XX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나,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는 'XX대학교 학생', 사회인이 돼서는 'XX기업'에서 일하는 나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곳에서 우리의 가치를 알리고,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를 완성시키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다. 나 역시 모두가 지향하는 '공동체 속의 나'라는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재수생이었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속한 집단이 없다 보니,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웠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를 때, '학생이세요?'라는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고, 사회의 규율, 통념에 벗어났을 때 큰 불안감을 느낀다. 사회가 올바르던, 혹은 에스티가 속해있던 하시드 파처럼 폐쇄적이든 한 집단을 벗어난다는 것은 큰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문제고, 에스티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 드라마의 두 번째 관전 포인트다.
관전 포인트 3. 다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