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포스터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포스터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우리에게 생소한 하시디즘(정통파 유대교 중 하나) 공동체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에스티는 같은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과 항상 다르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공동체를 떠난 자신의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만 불행한 정략 결혼에 도망쳐 베를린으로 간다. 

주인공 에스티가 속한 집단인 하시드 파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이며, 특히 여성에 관해 폐쇄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뉴욕 윌리엄스버그에 거주하며, 헝가리에 있는 사트마의 자손들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정채성은 전쟁 전이 아닌, 전쟁 후에 발전한 집단으로 학살이라는 트라우마에 갇혀있고, 이는 이들의 이념적 구조에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의 문화는 21세기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반문명적이고 폐쇄적이다. 규율과 성서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억압한다. 특히 여성은 사회 활동 참여,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남편을 받들며 홀로코스트에 학살된 인구를 채워 넣기 위한 역할로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에스티는 이런 자신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자신을 떠난 어머니가 있는, 베를린으로 떠나 자신의 삶을 찾게 된다. 

관전 포인트 1. 우리에겐 조금 낯선 하시드파 공동체, 소수 집단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스틸 컷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스틸 컷넷플릭스

이들의 모국어는 이디시어. 이들 때문에 이디시어(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아직까지도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다. 그 외에도, 드라마 속에서 볼 수 있는 하시드파의 외관, 의복, 결혼 의식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나는 여러 공동체 중, 특히 소외된 공동체를 보여줄 때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모르는 만큼, 그들의 문화를 왜곡하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야 메인스트림으로 그들의 이슈를 끌어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 자고 나란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아직은 문화적 다양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유대교에 관한 문제 외에도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인종차별 이슈, 이슬람교와 관련된 사회적 이슈를 한국에서 마주치기는 어렵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서인지 제작진들이 하시드파의 모든 문화들을 살리려고 노력한 문화적 디테일을 엿볼 수가 있다. 에스티가 살아온 뉴욕 윌리엄스버그의 모든 장면을 베를린에서 촬영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어디선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공감되는 경험이기에, 누군가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창구로서 이 드라마는 가치 있다.

관전 포인트 2. '세상에 나가 자기 공동체를 찾는 것, 공동체의 의미'

에스티는 대담하다. 항상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이런저런 의문을 품던 그녀는 세계와 배타적인 공동체를 떠나 자기 길을 찾는 선택을 한다. 에스티의 선택은 단순히 여성 인권 신장에서 바라볼 수 없다. 더 넓은 관점에서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베를린'이라는 장소는 에스티가 살아온 집단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겨 준 곳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곳에서 에스티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굴레를 끊어낸다.

위의 사진 속 호수 건너편에는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들을 학살하자고 논의한 별장이 있다. 에스티는 이 곳에서 어떻게 수영을 하나며, 들어가는 것을 거절하지만 친구의 " Lake is just a Lake"라는 말을 듣고, 호수에 몸을 담근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녀는 공동체를 거스르는 행위를 한 것이지만, 그녀는 아이러니하게 이곳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과거의 에스티처럼 우리는 '집단 속의 나'로 자신을 규정한다. 학생 신분일 때는 'XX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나,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는 'XX대학교 학생', 사회인이 돼서는 'XX기업'에서 일하는 나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우리는 공동체라는 곳에서 우리의 가치를 알리고, 맡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를 완성시키는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다. 나 역시 모두가 지향하는 '공동체 속의 나'라는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재수생이었을 때, '나는 어떤 사람이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속한 집단이 없다 보니,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웠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를 때, '학생이세요?'라는 질문에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우리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고, 사회의 규율, 통념에 벗어났을 때 큰 불안감을 느낀다. 사회가 올바르던, 혹은 에스티가 속해있던 하시드 파처럼 폐쇄적이든 한 집단을 벗어난다는 것은 큰 용기와 도전이 필요한 문제고, 에스티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은 이 드라마의 두 번째 관전 포인트다. 

관전 포인트 3. 다양성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스틸 컷
영화 <그리고 베를린에서> 스틸 컷넷플릭스
 
베를린에서 에스티가 제일 먼저 가게 된 곳은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하고 유능한 음악재능들이 자기 악기를 가지고 모여서 연습하는 학교였다. 유대인과 독일인을 포함해 의외의 세계를 한 곳에 모아놓았다. 또, 에스티가 우연히 만난 음대 교수는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에스티에게 장학 제도를 알려준다. 에스티와 같이 문화적 배경이 다양한 학생들을 위해 주는 장학 기회. 드라마에서는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다른 집단에서 온 그들을 '포용'하는 우리 사회를 놓치지 않는다. 

특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소수 집단에 대해 재조명하고, 그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서 우리에게 다시금 문화적 다양성, 포용성에 관해 생각해보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제삼자, 이방인으로서 그들을 함부로 비난하고, 그들의 사회를 고발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그들 역시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파이를 넓히고,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로서 바라봐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이 드라마는 독일에서 제작되었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에 관한 역사를 주제로 미디어를 생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역사관, 문화관을 엿볼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에스티가 장학생 오디션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스티가 부른 이디쉬들의 노래는 과거의 음악과 미래의 젊은이를 연결해준다. 고통의 장소에서 에스티는 자신의 공동체가 겪은 아픔을 끊어버리고, 자신이 받았던 고통도 승화해버린다. 세상과 우리는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미디어는 그 매개체로 우리에게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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