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최근 노년층이 가장 두려워 하는 질병 중 하나다. 치매는 환자뿐만 아니라 온 가족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그 치매에 대한 화두를 지난 5일 방송된 KBS 2TV 드라마 스페셜 2020 <나들이>가 다뤘다. 
 
 KBS 2TV <드라마 스페셜 2020-나들이>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스페셜 2020-나들이>의 한 장면 ⓒ KBS

 
치매에 걸린 영란씨 

소파에서 잠을 깬 영란씨, 그의 눈은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듯 허공을 헤매던 그녀의 눈에 익숙한 집안의 모습과 벽에 걸린 가족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영란 씨는 현실의 시간에 한 발 들어선다. 

잘 손질된 화단에 장독대, 마당까지 너른 번듯한 이층집, 그 안을 채운 시간의 두께가 느껴지는 가재도구들, 그곳에 영란씨라는 이름를 가진 노인이 홀로 산다. 한때는 음식 장사로 성공을 거둬 신문 지상에 오르내렸던 영란씨지만 이제는 몇 개 되지도 않는 계단조차 내려서는 것이 버거운 노년이다. 어렵사리 계단을 내려 장독 두껑을 챙겨 덮으며 그녀가 향한 곳은 병원이다. 

그리고 병원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청천벽력같은 '치매' 판정이었다. '내가 왜?'라며 벌컥 화를 내는 영란씨, 정신줄 놓지 않고 이날 이때까지 열심히 살아왔다는 그녀에게 치매라는 판정은 쉬이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치매'라는 판정과 함께 그녀에게 떠오른 기억이 있다.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그 '없던 시절', 그의 어머니도 '치매'였다. 밥그릇을 빼앗는 그녀를 문밖까지 쫓아와 '왜 밥도 못먹게 하냐'며 빗자루로 모질게 패던 어머니. 그 어머니의 병이 이제 그녀를 찾아왔다. 그 시절 두 아들과 함께 살아가기도 벅찼던 그녀에게 어머니의 '치매'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치매'라는 판정에 영란씨는 자신의 고통을 이제 자식들에게 안겨야 한다는 게 서럽다. 

배우 손숙은 자신을 찾아온 감당할 수 없는 병에 걸려 고뇌하는 노인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면 무엇이 제일 겁날까. 우선 치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그걸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병이 자기 자식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앞설 것이다. 늙고 병들어 가면서도 자식들을 걱정하게 되는 '인지상정', 드라마는 그 여전한 모성을 담는다.
 
 KBS 2TV <드라마 스페셜 2020-나들이>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스페셜 2020-나들이>의 한 장면 ⓒ KBS

 
영란씨와 순천씨의 나들이 

자신의 병을 알게 된 영란씨는 나들이를 떠난다. 그와 동행한 건,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잘난 자식들이 아니다. 영란씨에게 어수룩하게 포도 송이를 빼앗겼던 트럭 행상 방순철(정웅인 분)이다. 한때는 출판사를 운영했었다는 그는 과일전을 펴놓고도 아이들이 맛보기 과일을 퍼먹든 말든 그 옆에 앉아 시집을 펼쳐보는 장사에는 젬병인 장사꾼이다. 

그런 그이기에 물건을 떼기 위해 가는 원주 행에 함께 하고 싶다는 영란씨의 떼쓰는 듯한 청을 거절하지 못한다. 함께 떠난 여행, 물건을 떼는 농원에서 장사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영란씨 덕에 바가지는 쓰지 않았지만 거래처를 놓치게 된 순철씨는 그저 씁쓸한 미소 한번으로 삼키고 영란씨가 원하던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두 사람의 나들이는 원주로 고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순철씨라고 사정이 없을까. 사람좋은 만큼 세상살이 자기 것을 야무지게 챙길 잇속이 없던 순철씨는 가족마저 잃은 채 팔자에 없는 트럭 행상 중이다. 늦은 밤 과일이라도 챙겨주고 싶어 집 앞에 놔두고 떠나는 그에게 딸은 '돈'이 필요하다며 악다구니를 한다. 빚쟁이에 시달리지 않게 해주기 위해 이혼 도장을 찍어주는 게 다였던 순철씨에게 휴학을 밥 먹듯이 하며 대학을 다니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아버지 노릇을 요구한다. 

드라마는 나이도 다르고, 처지도 다른 두 사람을 '부모'라는 공통점으로 엮는다. 자식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해주고 싶은 부모 마음, 하지만 그 마음은 여의치않다. 자식을 위해 뭐든지 다해주고 싶어 손이 곱도록 장사를 했지만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영란씨의 자식들은 만족을 모른다. 그런데도 그런 자식들에게 영란씨는 자신의 병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순철씨 역시 뭐든 다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자식들은 다르지 않다. 가진 걸 다 퍼준 영란씨 자식들이나, 가진 게 없는 순철씨 자식이나 여전히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요구'할 뿐이다. 

그 '요구'를 채워주면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까? 드라마는 가진 걸 다 퍼부어 줬는데도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늙은 엄마 앞에서 더 달라고 떼를 쓰는 영란씨의 자식들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도리'를 묻는다. '배금주의' 사회의 이치를 따라 살아온 영란씨의 의지가지할 데 없는 처지를 통해 반문한다. 

그럼에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까지 쏟아부으려 한다. 그 마지막 선택이 영란씨는 더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그랬듯 치매인 엄마를 '의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순철씨는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영란 씨에게 '돈'을 구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두 사람의 선택은 원하던 결과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 대신 각자가 홀로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는 계기가 된다. 그간 두 사람의 나들이가 헛되지 않았던 탓이다. 치매에 걸린 노년,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가장의 무게, 그게 답이 있을까. 그래도 드라마는 답을 구한다. 드라마의 엔딩, 여전히 두 사람은 다시 '나들이'를 떠난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황지우의 시처럼, 그거면 되지 않을까. 너른 세상 잠시 잠깐이라도 서로가 '벗'이 되어 떠날 수 있는 시간, 그거라도 있다면 삶의 족쇄는 조금은 헐거워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드라마 스페셜 2020-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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