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내 인생
황금빛 내 인생 kbs2

원수가 된 두 가문의 아들, 딸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택했다. 과거 '사랑'은 지상 최대의 가치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사랑도 변하기 시작했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함께, '사랑' 이야기 속 여주인공들은 '사랑'과 '성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기꺼이 이 두 가지를 성취했다.

그리고 이제 2018년 3포, 5포, 9포 세대의 대변인이 된 KBS 2TV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여주인공 서지안(신혜선 분)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간다. 서지안은 죽음을 앞둔 자신의 아버지(서태수, 천호진 분)가 소망한 '핀란드 행'을 최도경이 사랑을 이유로 미뤄달라고 부탁하자 분노한다. '니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며, '왜 싫다는,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데 사랑이란 이름으로 발을 거냐'며 포효한다.

<황금빛 내 인생>은 전형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구도다. 어머니 양미정의 거짓말로 뒤바뀐 친딸, 그 사실이 밝혀지며 '원수' 사이가 된 두 집안의 남녀... 그 고전적인 갈등 구조에 맞추어 두 남녀 서지안과 최도경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두 남녀는 단순히 로미오와 줄리엣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 10대 재벌 기업을 바라보는 '해성'가와 한때 무역맨이었지만 월셋집을 전전하는 어려운 집안의 사랑은 그간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차용해 왔던 '신데렐라' 서사이기도 하다.

소현경 작가는 이런 고전적이면서도 익숙한 갈등의 서사를 2018년 버전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백마 탄 왕자의 2018년 버전인 최도경과 사랑에 빠진 서지안은 그가 타고 온 백마를 걷어찬다. 어려운 가정 형편, 그리고 그보다 더 난감했던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해성가의 친딸의 자리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서지안은 사실은 친딸이 아니었다는 충격적 상황을 맞이하며 그간 가져왔던 가치관의 '아노미'를 '자살 시도'라는 극적인 장치를 통해 겪어낸다.

그리고 김 말리는 양식장 일까지 거치며 어렵사리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입신양명'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친구 혁의 도움으로 시작한 목공 일을 '새로운 행복의 이상향'으로 바라보며 그곳에서 '성공' 대신 '성취'의 '로망'을 꿈꾼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변화에 대한 응답이 바로 '핀란드행 티켓'으로 구현될 예정이었다.

이렇게 지난 50회의 여정에서 어렵사리 자신의 진짜 꿈을 찾아가는 서지안에게 '사랑'은 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었다. 최도경이 해성가마저 버리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았을 때에도 '해성가'를 지옥처럼 여겼던 서지안은 굳건하게 그의 사랑을 외면하려 애썼다.

드라마는 서지안을 통해 2018년의 사랑은 둘이 함께 하는 사랑보다는 '개인의 실존과 정립'이 먼저라 일관되게 강변해왔다. 그렇기에 최도경과 서지안의 사이는 '방패'를 들고 사랑을 막아내는 서지안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려가며 그런 그녀에게 달려가는 최도경의 질주로 되풀이돼 왔다.

이렇게 50부작이 넘는 대장정을 진행해온 드라마에서 '메인' 서사인 두 주인공의 사랑은 '역신데렐라' 스토리의 뼈대로 진행되어 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눈빛만은 간절했던' 두 사람의 관계에 시청자들은 그럼에도 '사랑의 완성'을 꿈꾸었고 응원하여 왔다. 하지만 계속되는 '해성가만은 아니다'라는 서지안과 그럼에도 '너에게 가는 길'을 포기할 수 없다는 최도경의 일방적인 듯 일방적이지 않은 사랑의 도돌이표는 시청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50회, 다시 한 번 최도경과 만남에서 '왜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냐'며 분노하는 서지안을 보면서 적지 않은 시청자들조차 그간의 응원을 포기했다. '그래 이제 그만 헤어져라'라고... 50부의 여정 속에서 결국은 시청자들조차도 '포기'하게 만든 이 '역신데레라 스토리'가 추구했던 것이 2018년의 자기 주도적 사랑의 결말일까? 역시 2018년에는 '사랑'조차 사치인 게 맞는 걸까?

아버지의 그늘이 너무 큰 아이, 서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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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루기보다는 이젠 그만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이 사랑. 소현경 작가는 그 집요한 사랑의 주인공 서지안을 이 시대의 자기 주도적 여성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서지안의 행보를 '자기 주도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극중 서지안이 극적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장면이 몇 있다 . 그 첫 번째가 스스로를 자살로 몰아가던 그 시점, 해성가에서 쫓겨나 힘들게 집으로 돌아오던 서지안은 해성가의 아버지 최재성(전노민 분)에게 자신의 친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이 얻어맞는 장면을 목격한다. 해성가에 들어가 있는 내내 서지안을 죄책감에 빠뜨렸던 건 바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를 외면했다는 것. 바로 그런 죄책감의 대상인 아버지가 자신으로 인해 수모를 겪게 되자, 서지안은 그 길로 '현실'을 버린다.

그 다음, 겨우 김 말리는 양식장에서 혁의 도움으로 추스리고 나왔지만 아직 집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을 시점.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던 최도경이 자신의 생환을 아버지에게 알려주었다는 사실에 서지안은 '그게 너였어!'라며 포효한다. 그리고 이제 50회, 위암에 걸린 아버지가 자신으로 인해 해성가의 할아버지에게 따귀를 맞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무릎까지 끓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지안은 다시 한번 최도경에게 분노를 퍼붓는다.

50회의 여정에서 서지안은 최도경과 사랑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사랑, 가장 큰 그늘을 드리운 건 '아버지'다. 소현경 작가의 전작 <검사 프린세스>나, <내 딸 서영이>처럼 여전히 딸에게 가장 큰 사랑은 '아버지'다. 줄리엣이 된 서지안이 선택한 건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여전한 내 '가족', 그리고 '나'인 것이다.

사랑은 남녀의 만남이지만, 그건 '성장'이다. 가족의 품 안에서 자란 남녀가 '가족'을 극복하고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성장'의 서사에서는 '사랑'이 중요한 통과의례로 등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금빛 내 인생>의 서지안은 언뜻 보면 자기 주도적인 '걸크러쉬'이지만, 지난 여정에서 그녀의 비등점을 되돌이켜 보면, 여전히 그녀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년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15, 16세였지만 '사랑'을 하며 '성인'이 되어 자신의 가족을 벗어났다. 하지만 가족이라면, 그 중에서도 아빠라면 '감정'이 앞서는 서지안은 여전히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는 어쩌면 아직 사랑을 하기엔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신화 속 영웅의 서사에 '살부'가 통과례가 된 건, 아버지가 걸림돌이 된 건, '어른으로서의 독립'을 상징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지안은 '아버지'의 그늘에 여전히 놓여있다. 드라마는 죽어가면서까지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부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부성'은 안타깝게도 딸의 지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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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회 서지안이 보인 '분노의 표출'에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는 반응은 바로 이런 준비되지 않은 사랑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다. 물론 소현경 작가는 가해자였던 서태수네 가족을 명탐정 서태수를 통해 '은인'으로 변화시켰다. 그런 가운데 '해성'이라는 재벌가는 여전히 '갑질'의 상징으로 굳건하다. 심지어 그런 '해성'을 나와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려 했던 최도경조차 '이기적인 사랑'이라 규정내린다. 심지어 '위암 말기'라는 설정으로 서지안의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희생적인 부성애의 상징으로 승화된다.

50회 서지안의 대사는 내용상으로는 '틀리지' 않았다. 여전한 '갑질'에 '위암 말기'의 아빠가 수모를 겪었다는 것을 안 딸의 분노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 '태도'의 문제가 시청자들을 등 돌리게 한 것이다. 아버지라면 여전히 '감정'이 앞서는 딸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보인다.

사랑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며 달려온 연인의 '핀란드 행' 만류에 여전히 분노하는 그 '자기애'라면 차라리 자신의 길을 가라고 권유하고 싶은 것이다. '사랑'마저 걸림돌이 된 서지안, 자신의 가족 속에 웅크린 서지안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드라마는 종영을 2회 앞두고 있어, 사랑 앞에 용기를 내줄 것을 기다렸던 시청자들은 기다릴 여유가 없다. 그러니 이제 '사랑'으로의 성숙 대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라는 역설적 응원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소현경 작가가 <황금빛 내 인생>을 통해 줄기차게 비판적으로 제시해 온 '재벌 갑질'의 폐해, 그리고 그런 재벌가와의 신데렐라 서사의 극복이라는 야심찬 시도는 안타깝게도 후반부에 들어서 작위적인 부성애의 강조로 인해 방향을 잃고 만다. 작가가 '아버지'를 갸륵하게 만들면 만들 수록, 딸의 사랑은 방향을 잃고 만다.

심지어 이제 사랑에 대한 응원조차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이 상황을 뚫고 소현경 작가는 주말 가족 드라마의 정석 해피엔딩을 만들어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아니면 주말 드라마 최초 메인 커플의 이별로 마무리될 것인지... 어쩌면 지금 <황금빛 내 인생>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필요한 건 '해피엔딩' 여부보다 차라리 이별이라도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는 개연성 있는 서사일 듯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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