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입구 맞은 편 골목 아래 위치한 향린교회
성하훈
영화에서 재야인사 김정남이 은신한 곳으로 나오는 향린교회는 명동성당 앞 골목길에 위치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을 지휘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된 역사적인 공간이다. 한국사회의 변혁운동에 앞장섰던 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기도 한데, 영화에서는 실제장소가 아닌 상상력을 가미한 장소로서 교회 이름이 사용됐다. 최근 재개발로 인해 옛 중앙극장이 사라지고 길이 넓어지면서 골목길의 정취는 없어졌다.
영화에 나오는 서울시청 앞 광장의 시위장면 또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1987년 당시 서울시청 앞으로 진출한 것은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이 유일했다. 서울시청 앞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는 많았으나 서울역 쪽 남대문이나 소공동, 을지로입구, 무교동 쪽에서 막히기 일쑤였다. 따라서 영화에 나오는 차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촛불시위의 상징과도 같은 서울시청과 광화문 네거리는 청와대로 향하는 길목이나 시위대가 진출할 엄두를 못 낼 만큼 경찰의 방어가 철통같았다. 접근하려고 하면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사됐다. 80년대에 이뤄내지 못하는 광화문 돌파를 이뤄낸 것은 2000년대 촛불시위였다.
1987년 당시 운동권 가요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이 많이 모여있을 때 학생들이 함께 부르던 노래는 애국가였고, 6월 항쟁 때는 태극기를 흔드는 시위가 많았다. 당시에는 태극기도 시위용품으로 분류됐다. 1987년의 숭고한 태극기는 그 가치를 떨어뜨린 지금의 태극기 시위에 대비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긍정적으로 묘사된 인물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당시 보수적인 인사들도 자기 위치에서 소임을 다한 것은 평가받아야할 부분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부검을 막았던 최환 검사는 공안부장의 이력이 설명해줄 만큼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1987년 1월 상황에서 그가 검사로서 내린 원칙적 판단은 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
보안계장으로 나오는 안유 역시 마찬가지다. 이후 수감자들에 대한 비인권적인 행위를 자행한 과거로 인해 당시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로부터 미화시켰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당연한 지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고문 조작 사실을 알린 그 순간만큼은 양심의 목소리를 전달했고 그 역할이 1987년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낸 사실은 별개로 인정받야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