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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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에 영화 내용의 일부가 담겨있습니다

제프 니콜스의 영화 <테이크 쉘터>에 등장하는 커티스(마이클 섀넌 분)는 확연히 이상해 보이는 남자다. 생계를 위해 건설노동을 하며 아내와 청각장애를 지닌 어린 딸을 부양하는 그는 언제부턴가 마을을 휩쓸어버릴 거대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막연히 맹신한다. 그가 언제부터 이러한 맹신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커티스의 이상심리가 영화의 첫 장면-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며 누런 빗방울이 떨어지는 꿈(혹은 환상)-으로부터 기인하는지, 혹은 (그가 의심하듯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 기질로서 오래전부터 잠재돼 온 것이었는지의 여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첫 장면에서 드러난 커티스의 표정은 영화 <테이크 쉘터>를 관통하는 거대한 전제에 해당한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남자.'

영화의 초중반에 그려지는 커티스의 일상은 정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린 딸이 청각장애를 지녔다는 것 이외에 커티스 부부를 둘러싼 일상의 궤적은 여느 가정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카메라는 자연의 거대한 변이가 이들을 점차 압박하는 모습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가령 인물의 배경이 되는 지평선이 중반 아래에 배치됨으로써 먹구름 자욱한 하늘이 인물을 내리 누르는 듯한 모양새로 그려지는 것이 한 예이다.

이는 커티스의 심중에 내재된 막연한 불안을 관객에 납득시키기 위한 구조상의 기법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그가 느끼는 불안이 필연적 성격을 지녔음을 강변하는 수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가정이라는 소우주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대자연의 거대함은 영화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환기되는 요소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커티스를 불안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영화는 커티스의 꿈과 현실을 교묘히 뒤섞는데, 급기야 중반 이후에는 꿈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마저 허물어뜨림으로써 그가 겪는 일상 자체가 거대한 환각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가 꾸는 꿈들은 일관적으로 자신과 딸에게 닥치는 여러 형태의 종말론적 파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그 파멸을 불러오는 것은 하나같이 구체적 형상(사람 혹은 동물)을 띤 대리물로서, 그가 궁극적으로 두려워하는 천재지변(폭풍우)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 찬란


커티스는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려는가?

어쩌면 커티스는 천재지변이라는 일종의 '재앙'이 물리적 형상을 한 절대존재(신)의 대리자가 불러일으킨 인위적 사건에 해당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절대자에 대한 관념이라는 점에서 이는 반종교적 신념에 가깝다. 독실한 신앙을 지닌 처가 식구들을 마뜩찮게 여기는 태도 또한 절대자에 대한 숭앙에 거부감을 느끼는 그의 본능적 성향에서 비롯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한 커티스는 능동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하려 애쓴다. 그런데 그가 보이는 일련의 행동들은 사뭇 모순적인 양상을 띤다. 가령, 도서관에서 정신질환과 관련된 책을 구한다거나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방문해 자신의 증세가 집안내력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는 이성적 행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그는 마트에 들러 비상용 식량을 잔뜩 구비하며, 가족들이 사용할 방독면을 비싼 가격에 구입하는 등의 강박적 행동을 보인다. 커티스가 앓고 있는 정신분열과 재앙에 관한 두려움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일진대, 그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두 개념을 별개로 치부한다.

숱한 악몽과 발작에 시달린 커티스는 급기야 무리한 지출을 감행하며 집 앞 마당에 방공호를 설치한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커티스는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것인가? 그는 자신의 망상과 환각이 정신질환에 가까운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폭풍우에 대한 과도한 걱정 또한 이러한 망상의 연장일 뿐임을 그는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방공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다.

이 시기 그가 꾸는 꿈의 양상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초기의 꿈들에서 커티스와 딸을 공격하는 주체는 비교적 외부에 속한 추상적인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 주체는 점차 오랜 친구인 듀워트와 아내 같은 비교적 가까운 인물들로 좁혀지고 있었으며 이에 커티스는 자신의 집 또한 딸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없음을 느낀다. 세상을 믿을 수 없는 커티스의 피난처는 지상에 속한 것일 수가 없으므로, 거대한 땅굴을 파내어 피난처를 만들기에 이른다.

 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영화 <테이크 쉘터>의 한 장면 ⓒ 찬란


실체 없는 악몽, 현실적 문제와 얽히다

영화 <테이크 쉘터>를 지배하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뭇 종말론적이다. 그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내러티브의 비균질적 궤도는 영화 속 커티스의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관객들마저 혼란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이 영화는 얼핏 현대를 배경으로 한 신화 혹은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내러티브 바깥 구체적 현실세계와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으려 한다. 딸을 지키기 위한 커티스의 강박적 행동은 결과적으로 주택 담보대출이나 의료보험과 같은 현실적 문제와 얽히게 되면서 가정의 경제적 상황을 옥죄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이는 궁극적으로 딸의 미래마저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경제적으로 중산계급에 속하지 못한 커티스 가정의 형편을 두고 보자면, 이 이야기를 현대 미국사회에 속한 중산계급 (혹은 중산계급에의 진입을 꿈꾸는 계층)의 사회적 불안에 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읽어내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부의 거대한 불안요소들을 의식하고 소극적이나마 저항하는 것이, 자칫 그 자신의 존재에 위해를 가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고 보자면 이 영화는 지독히 절망적인 함의를 띠는 셈이다.

커티스는 방공호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지만, 그것은 기어이 도래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을 지켜주지 못하는 거짓 구원에 다름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신의 명령에 순응하여 대홍수에 대비한 노아는 방주를 통해 그 가족과 세상의 피조물들을 구원하였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두려워한 커티스는 결국 방공호를 내버려 둔 채 거대한 폭풍우를 맞이하게 된다.

권좌를 차지했던 신의 직위가 자본에 의해 박탈당한 세상 속에서 커티스 가정의 운명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말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신의 예견은 존재하지 않았고 커티스 자신의 불안은 세상의 필연적 종말을 투영한 리트머스 시험지에 다름 아니었기에, 이로부터 벗어날 구원의 길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커티스 가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앞두고서야 이를 깨닫고, 무덤덤하게 재해와 조우한다.


테이크 쉘터 제프 니콜스 마이클 섀넌 방공호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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