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8대 대통령선거가 9일 앞으로 다가온 10일 오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가 여의도 KBS스튜디오에서 진행된 2차 TV토론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TV토론은 종국적으로 대선후보의 철학과 가치를 온 국민 앞에서 검증받는 시간이다. 오고 가는 질문 속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순간이야말로 한 표 한 표를 행사할 국민이 한 정치인의 민낯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이다. 물론 단순한 임기응변까지도 판변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지속해서 제기되어왔던 터무니없는 룰의 적용이야말로 대선후보 TV토론의 시청률을 40%대까지 끌어올리지 못하는 주요 원인일 것이다(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시청한 시청자들까지 합산하지 못하는 이 시청률 제도 역시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사항이다). 그런 점에서 '6억'과 '다카키 마사오'와 같은 국민적 유행어(?)를 낳았던 1차에 비해 2차 토론은 브라운관으로 향한 그 열기에 비해 차분할 수밖에 없었다.
1차 토론과 별다를 것 없이 원고를 읽는 담화 수준의 토론 아닌 토론을 벌인 박근혜 후보 앞에서 '토론의 달인' 오바마를 데려온들 열띤 논쟁이 벌어질 수 있을까. 룰을 바꾸지 않는 이상 우리는 미국 대선과 같은 살 떨리고 숨이 헐떡거리는 그런 토론은 보지 못할 운명에 처했다 봐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이정희 후보의 선전과 문재인 후보의 협공은 이 토론을 끝끝내 지켜봐야 하는 당위(?)의 '떡밥'들을 투척해 주고 있었다. 후반부 자유토론에서 보여준 3인의 참모습을 확인하기까지 그나마 흥미진진했던 순간들을 몇 가지 꼽아 봤다. 이건 전적으로 토론의 자세와 대통령상에 관한 이야기다.
지하경제 활성화와 '5.8조', 말실수도 이젠 지겹다"세입 확대는 비과세 감면 제도를 정비한다든지 또 지하 경제를 활성화한다든가 이렇게 달성해서 매년 27조 원씩 5년간 135조의 재원을 마련할 계획입니다"박근혜 후보의 재원 마련 방안 중 일부다. 자, 그러니까 저 강남의 룸살롱을 필두로 강남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인 '지하경제'를 양성화도 아니고 활성화하겠다는 저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대통령 후보의 당당함이라니? '여성대통령'으로서 군인들을 진두지휘하는 한편 '조폭'들까지 거느리겠다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재원조달의 방안으로 수첩에 적어 준 것은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이룰 두고 한 트위터 사용자(@me*******)는 "어제 토론에서 박근혜의 가장 큰 성과. '지하경제 활성화' 발언으로 사채업자, 조폭, 마약사범들의 폭넓은 지지 확보, '줄푸세와 경제민주화는 다르지 않다'는 발언으로 재벌기업들의 성원을 받을 것이다. 국민 말고 지하와 재벌 세계의 대통령이 되시라!"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자기 주력 분야인 '경제' 공약도 이해를 못 하는 한 대통령 후보 민낯의 재발견이랄까. 여기에 5조 8천억을 '5.8조'라 쓰인 것으로 보이는 원고를 "5점8조"로 발성한 대목은 토론을 지켜본 누리꾼들이 뽑은 '화룡점정'이었다.
▲ 제18대 대통령선거가 9일 앞으로 다가온 10일 오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가 여의도 KBS스튜디오에서 진행된 2차 TV토론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연예인은 탈세혐의로 은퇴했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6억 원을 받았다고 지난 토론 다시 말씀하셨는데 그에 대한 세금은 내셨나. 지난번 토론에는 사회 환원을 말씀하셨던 것이고 세금을 냈는지를 여쭤보는 것이다. 고소득층이 다 재산을 숨겨놨다고 하면 과연 서민들이 세금을 낼 기분이 들겠나. 대통령 될 사람이면 세금만큼은 내야 한다." (이정희)
대통령이 될 사람들은 자고로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자기가 내놓은 공약과 약속을 한 번 내뱉고 기억 저편으로 날려버린다면 그 누가 그 대통령의 정치 노선을 믿고 따르겠는가(하지만 우리는 그런 대통령을 수없이 봐야만 했다는 것이 비극이겠지만).
박근혜 후보는 여기서 "대통령이 될 사람이 왜 자꾸 과거에 일에 연연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얼버무렸다. '줄푸세'가 재벌과 상위층 편들기가 아니라고 부르짖는 대통령 후보가 자신이 '소녀 가장'이던 시절에 받은 국가 재산을 꿀꺽했던 그 과거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은 어쩌면 이날의 결정적 장면이었을 것이다. 배우 김여진은 이 모습을 보고선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다.
"연예인은 탈세 혐의 받아 기자 회견하고 은퇴했었다…."박근혜 후보가 지금은 <무릎팍도사>와 <스타킹>으로 복귀한 방송인 강호동이 1년 전 눈물을 글썽이며 통한의 기자회견을 통해 잠정은퇴를 선언했던 그 장면을 직접 봐야 했다. 그 시절 '소녀가장'의 6억보다 훨씬 못 미치는 세금을 탈루했던 강호동도 진심으로 참회하며 연이은 '통 큰 기부'로 국민들에게 사죄를 빌었어야 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진중권도 불안해한 '불안한 눈빛'과 '더듬거리는 말투'"박 후보의 공약에 의하면 심장질환은 국가가 책임지고 간 질환은 책임지지 않는다. 그것이 합리적인 구별입니까." (문재인)
"국민들이 중증으로 인해 가장파탄까지 가는, 중증들을 먼저, 그런것부터 건강보험에서 100% 보장을 함으로써, 그런 중병을 앓아도 병원도 못 가고 치료도 못 받는 국민이 없도록 해야되겠다.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박근혜)
토론의 8할은 자신감이다. 그건 '사망유희토론'을 통해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일베' 회원과 진행한 토론 동영상을 통해 교본으로 남겨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평소의 지식과 철학이 적절히 결합하고 자기화돼 있지 않는다면 절대 상대방을 설득하고 납득시킬 수 없다.
자신들이 국민을 위해 지키겠다고 내놓은 공약에 대해 자신감은커녕 확신에 찬 한마디 대답도 못하는 모습이야말로 TV토론의 시청률과 흥미를 떨어뜨리는 주요인일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후보의 그 '불안한 눈빛'은 심한 말더듬으로 표면화됐다. 암기력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보는 사람도 안쓰러울 정도의 토론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부터 우황청심환이라도 하나 쥐여드려야 할 것 같은 강한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오죽했으면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민망해했을까.
"오늘 점수 이정희 80점, 문재인 80점, 박근혜 후보는 흠…. 오늘은 좀 민망해서 점수 안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