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한국축구 최고의 유망주로 꼽혔던 이강인의 부침이 길어지고 있다. 불확실한 거취 속에 소속팀에서는 이미 자리를 잃었고, 덩달아 대표팀에서도 외면받고 있다.
발렌시아 유스팀 출신인 이강인은 꾸준한 성장 끝에 2019년부터는 1군무대에 합류하며 기대를 모았다. 같은 해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대회 최우수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까지 품에 안았다. 차범근-박지성-손흥민으로 이어지는 한국축구 간판스타 계보를 이을 유력한 '차세대' 유망주로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이후 이강인의 축구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발렌시아는 스페인의 명문구단으로 꼽히지만 최근 몇 년간 구단주의 방만한 운영으로 예전의 명성을 잃고 혼란에 휩싸여 있다. 지속적인 성적 하락으로 우승권은 커녕 유럽클럽대항전 진출도 몇 년째 멀어졌고 감독들이 매년 교체되는 사령탑의 무덤으로 전락했다. 설상가상 코로나19 사태로 재정까지 급격히 악화된 발렌시아는 팀내 주축 선수들을 대거 팔아치우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구단 운영진과 감독들 간의 갈등, 선수단 내 파벌싸움에 대한 의혹이 거론되며 여기에 휘말린 이강인도 '왕따설' 등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구단 내부 정치적 상황 속에 이강인은 여러 감독들이 거쳐가는 와중에도 중용되지 못하고 한창 뛰어야 할 시기에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난 2020-21시즌 이강인은 구단으로부터 기회를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잔류했으나 라리가 24경기에서 총 1267분 출장에 그쳤다.
이강인은 결국 이적을 결심했다. 잔류를 설득하던 발렌시아도 이제는 이강인의 이적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미 뛰어난 잠재력을 여러 차례 증명한 데다 계약 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만큼 이적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좀처럼 새로운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최근 스페인 매체 '아스'는 "이강인이 자신에게 온 4팀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강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팀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발렌시아에서 소속팀의 신뢰 부족으로 여러 번 상처를 받았던 이강인이 자신에게 맞는 팀을 신중하게 고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문제는 어느덧 새로운 시즌이 개막했고 이강인이 여전히 경기에 제대로 출전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상황이 꼬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강인은 김학범 감독이 이끌던 2020 도쿄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주로 교체멤버로 짧은 시간만 활용되며 팀의 8강탈락을 막지 못했다. 불과 2년전 U-20 월드컵에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것을 감안하면 아쉬운 플레이였다. 새 감독 체제로 새 시즌에 돌입한 발렌시아에서는 리그 2경기에 연속 결장했다.
이강인은 A대표팀 명단에서도 제외됐다. 파울루 벤투 감독은 23일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 2차전에 출전할 26인의 명단을 발표하며 이강인을 선택하지 않았다. 벤투 감독은 이강인을 뽑지 않은 것에 대해 "전술-전략 적인 이유"라고 설명했다. 절제된 표현을 썼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포지션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2선 공격형 미드필더가 주포지션인 이강인의 자리에는 남태희, 권창훈, 이동경, 이재성 등 활용자원이 풍부하다.
이강인을 아끼는 많은 축구팬들은 그가 소속팀이든 대표팀이든 모두 팀운 혹은 감독운이 없다고 안타까워한다. 이강인은 성인무대에서 한번도 자신을 신뢰하고 제대로 활용해줄 수 있는 감독을 만나지 못했다. 벤투 감독 역시 이강인을 A대표팀에서 여러 차례 발탁하기는 했으나 정작 기용에는 보수적이었고, 지난 3월 한일전에서의 제로톱 기용처럼 이강인에게 맞지 않는 전술로 활용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부족한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일단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자신의 장점을 확실히 보여줬던 이강인이기에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면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어떤 감독들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현재 이강인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강인은 공격형 미드필더 중에서도 패스와 테크닉에 능력치가 집중된 전형적인 '플레이메이커형 10번'에 가깝다. 공수밸런스와 활동량, 멀티플레이, 압박을 통한 적극적 수비 가담 등을 중시하는 현대축구에서 지네딘 지단이나 리켈메, 윤정환, 메수트 외질같은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형 선수들의 전술적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동안 이강인을 가장 잘 활용했던 인물은 U20대표팀에서 함께했던 정정용(현 서울 이랜드) 감독이었다. U20 대표팀에서 이강인에게 수비부담을 최소화시키고 원톱 스트라이커의 바로 아래에서 프리롤에 가까운 자유도를 부여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부여하며 대성공을 거둔 바 있다.
그런데 이런 유형이 흔히 그러하듯, 선수의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미드필더진 구성부터 전술의 중심을 철저하게 해당 선수 위주로 맞춰야 한다. 플레이메이커의 부족한 수비가담이나 활동량을 상쇄하기 위하여 동료들이 희생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지단이나 안드레아 피를로처럼 압도적인 월드클래스 선수가 아닌 이상, 플레이메이커가 봉쇄당할 경우 팀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연령대별 대표팀 레벨에서는 압도적인 역량을 갖춘 이강인의 원맨쇼가 가능했지만, 성인무대에서는 이강인을 살리기 위하여 그를 중심으로 전술의 포커스를 맞춘다는 것은 감독 입장에서 모험이다. 이강인은 애매한 포지션과 수비가담 능력이라는 범용성의 한계 때문에 아직 풀타임 주전으로서의 역량도 명확하게 증명하지 못했다. 자신의 포지션에서 월등한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상 이 문제는 앞으로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수 있다. 지금의 이강인은 거취문제를 최대한 빨리 결정하고 소속팀에서 경기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급선무다.
이강인도 어느덧 20대에 접어들었고 동세대 유망주들은 하나둘씩 프로팀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성장이 정체된 이강인으로서는 이번 이적 여부가 축구인생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
또한 1년 뒤에는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있는만큼 병역문제까지 고려하면 새로운 소속팀과의 계약과정에서 대표팀 차출에 대한 사전협의도 중요하다. 축구 인생에 있어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강인에게 신중한 선택을 내려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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