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철인왕후>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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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는 헌종 때인 1837년 어머니 이씨와 아버지 김문근(1801~1863)의 딸로 태어났다. 김문근은 순조의 장인으로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발판을 구축한 김조순의 7촌 조카벌이다. 원래는 11촌이었지만 김문근의 입양을 통해 7촌으로 바뀐 관계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이듬해인 1885년에 개화파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으로, 일본 덴리도서관에 있다가 1987년 국내에 소개된 <흥선대원군 약전>에 따르면, 김문근은 철종시대에 김좌근(김조순 아들), 김병기(김좌근 양자), 김병국(김조순 11촌)과 더불어 안동 김씨 4인방을 형성됐다. 딸이 철종의 왕비가 돼 있을 때 정치적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다.
'철종시대의 안동 김씨' 하면 흥선군 시절의 이하응을 핍박하는 권세가들이 떠오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생각은 소설가 김동인의 <운현궁>이 빚어낸 잘못된 이미지에 근거한 것이다.
흥선군 집안 외에는 마땅한 왕손이 없었던 시절에 <운현궁> 속의 안동 김씨들처럼 흥선군을 박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권력 흐름에 민감했던 안동 김씨 가문이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었다. 김문근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선대원군 약전>은 김좌근·김병국과 더불어 김문근이 흥선군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왕후로 있는 동안에 아버지 김문근이 가문 사람들과 함께 전성기를 누린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철인왕후는 자기 아버지는 물론이고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정조가 죽은 뒤인 순조·헌종·철종시대에 경주 김씨, 풍양 조씨, 안동 김씨가 왕도정치(유교적 합법정치)의 정반대인 세도정치(특정 가문의 비제도적 독재정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씨 왕실과의 혼인관계 때문이었다. 힘없는 왕들을 대신해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왕실의 사돈가문이라는 지위 덕분이었다. 이런 가문의 지위는 왕실에 시집간 여성한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도가문 출신 왕후들은 국정에 직접 간여하지 않는다 해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의미가 컸다. 철인왕후 역시 그런 존재였다. 그는 안동 김씨의 권세가 절정에 달했던 철종시대를 살면서 자기 가문의 정권 유지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또 다른 의미에서도 그는 역사적 의의를 띤다. 그는 여섯 살 연상인 철종이 죽고 철종의 7촌인 고종이 즉위하고 뒤이어 흥선대원군이 실권자가 되어 안동 김씨 세도는 물론이고 세도정치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버지 김문근으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던 흥선군이 자기 가문의 정치적 기반을 무너트리는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런 뒤 그는 흥선대원군이 아들 부부의 정치공작에 의해 2선 퇴진을 당하는 모습까지 지켜본 다음에 1878년에 향년 41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도시대의 몰락 목격한 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