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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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당 역할 한 안동 김씨 가문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안동 김씨가 장동 김씨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안동 김씨는 구 안동 김씨와 신 안동 김씨로 나뉜다. 신 안동 김씨는 고려 왕건의 통일전쟁에 협력한 공으로 김씨 성을 하사받은 김선평의 후손들이다. 이들이 장동 김씨로도 불려왔다.
정조가 죽은 1800년에 개막돼 순조·헌종·철종 재위기를 풍미한 세도정치시대의 3대 가문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경주 김씨다. 이들은 각각의 시기에 왕실을 무력화시키며 왕실 겸 집권당 역할을 겸했다. 1863년까지 계속된 이 시대에 안동 김씨는 대략 48년간, 풍양 조씨는 12년간, 경주 김씨는 3년간 집권했다.
1800년부터 3년간 집권한 경주 김씨가 퇴장한 뒤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정권을 주고받았다. 안동 김씨는 3차례, 풍양 조씨는 2차례 집권했다. 횟수로는 별 차이가 나지 않지만, 매 시기의 집권기간은 안동 김씨 쪽이 훨씬 길었다. 그래서 48년 대 12년이 된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19세기 전반기에는 안동 김씨가 사실상의 왕실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씨 왕실은 권위만 가졌을 뿐,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씨 왕실이 유별나게 경계한 가문이 바로 김씨였다. 여기에는 철학적 이유가 작동했다. 한자 이(李)에 나무 목(木)이 있다. 나무한테 가장 위험한 것은 도끼다. '금도끼 은도끼' 설화에서는 나무꾼이 쇠도끼를 선택하자 산신령이 감동을 받지만, 나무꾼을 두려워하는 나무들의 입장에서는 쇠도끼를 선택했다는 것이 오히려 무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金)씨는 '쇠'를 뜻하는 한자를 쓰는 가문이다. 이 때문에 이씨 왕실은 '김씨는 이씨를 베는 성씨'라고 경계했다. 음력으로 선조 10년 5월 1일자(양력 1577년 5월 18일자) <선조수정실록>에 "원래 궁중에서는 옛 임금들 때부터 '김이라는 성은 목(木)을 가진 성에 해롭다 말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이렇게 김씨를 경계했는데도, 추존 왕후를 제외한 36명의 왕후 중에서 10명이 김씨 가문에서 배출됐다. 거기다가 1800년 이후에는 안동 김씨가 48년간이나 왕실을 억눌렀다. 19세기 전반기 조선 왕족들의 뇌리에 위의 <선조수정실록> 이야기가 자주 스쳤을지도 모른다.
안동 김씨는 이처럼 막강한 세도가문이었지만, 이 '막강'이란 것은 세도정치시대에 국한된 것이고, 나아가 조선시대에 국한된 것이었다. 관점을 확장하면, 공식 왕실이 아니면서도 이 가문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가문들을 다른 시대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최충헌 가문과 오늘날의 김일성 가문을 그 일례로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