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스틸 이미지
아이 엠(eye m)
지난 2년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재산 압류조치를 무시해왔던 일본제철(신일철주금)과 일본정부가 태도를 다소 바꿨다.
오는 11일 0시까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으면, 압류된 PNR(포스코 부산물자원화법인) 주식을 처분할 수 있게 되자, 이에 제동을 걸고자 일본제철은 압류 결정에 항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야모토 가쓰히로 부사장이 4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 같은 입장을 내놨다. 압류 재산의 현금화를 최대한 지연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1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을 강제징용 해놓고 임금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일본제철이 피해자 4인에게 총 4억을 배상하라는 판결에 대해 이처럼 무성의하고 파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은 도리어 한국을 나무란다.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은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문제와는 무관한데도 '1965년에 다 끝난 문제를 한국이 계속 거론한다'고 불평한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의 대응을 편협한 민족주의의 산물로 매도한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 극우세력도 그런 비난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은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노력을 반일'민족'주의도 아니고 반일'종족'주의라는 표현으로 폄하한다. 작년에 발행한 <반일종족주의> 제13장에서 이영훈은 반일종족주의를 '저열한 정신세계'로 비하했다. 공동 저자인 김용삼 전 <조선일보> 기자도 제14장에서 '저열한 정신문화'라는 표현을 쓰며 비하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조직원들의 항일투쟁
하지만 한국인들이 편협한 민족감정이나 저열한 반일종족주의 때문에 식민지배 청산을 추진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오는 20일 개봉되는 다큐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속의 반일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제목으로도 사용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東亞反日武裝前線) 조직원들의 항일투쟁이 한국인들의 식민지배 청산 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도록 만든다.
한국의 반정부 혹은 반체제 운동에서는 '반한(反韓)' 혹은 '반한국'이란 표현이 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속의 일본 투사들은 '반일'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투쟁의 객관성 혹은 보편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70년에 반체제 대학 서클로 시작해 1972년에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으로 조직화된 이들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에 맞서고자 투쟁 대열에 뛰어들었다.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는 과거의 농업경제 시대에도 있었다. 최대 지주인 왕실이 소수의 대지주들과 합작해 민중에 대한 수탈 내지 착취를 통해 이윤과 조세를 증대시키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에 민중을 동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착취 구조는 자본주의 및 그것의 글로벌 확대판인 제국주의 시대에 한층 극명해졌다. 노동 착취의 강도나 침략 범위의 측면에서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간 착취 시스템이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이 맞서 싸운 대상은 바로 그 제국주의다. 영화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그 같은 제국주의에 대한 이 조직의 반일 투쟁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영화는 식민지 한국에서만 10만 명 정도를 강제징용하고 공짜 노예노동을 발판으로 비약적 성장을 이룩한 미쓰비시그룹에 대한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의 투쟁을 비춘다. 이 조직은 1974년 8월 30일 미쓰비시중공업 도쿄 본사에 폭탄을 터트림으로써 제국주의적 유산에 발을 딛고 경제적 번영을 이어가는 일본 국가의 부조리를 고발한다. 이들이 1974년, 1975년에 공격한 대상은 미쓰비시 외에도 미쓰이 물산, 데이진 중앙연구소, 가지마건설, 하자마구미 등등이다. 이들은 1945년 일제 패망 이후에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지원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을 부추긴 한국산업경제연구소에 대한 폭파 공격도 감행했다.
해방 뒤에 나타난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 역시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배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들은 4·19 혁명에 맞춰 1975년 4월 19일 한국산업경제연구소 공격을 단행했다.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 조직원들은 제2의 이봉창이었다. 1932년에 히로히토 일왕(천황)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가 미수에 그친 이봉창처럼, 반일무장전선은 1974년 8월 14일 히로히토의 열차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인 히로히토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일본에서 벌어지는 인간 착취 구조의 모순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작전은 히로히토의 행선지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기초한 것이기에 애당초 성공할 수 없었다. 이때 쓰지 못한 폭탄은 16일 뒤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폭파 때 사용됐다.
공교롭게도 일왕 암살 실패 다음날인 8월 15일, 한국에서 재일한국인 문세광이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하려다가 부인 육영수를 실수로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한 한·미·일 삼각 협력체제의 하부 구조에 있는 한·일 착취구조의 정점을 이루는 두 인물에 대한 공격이 하루 간격으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폭탄 공격을 통해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은 '신(新)대동아 공영권을 책동하는 제국주의 침략기업과 식민주의자들은 해외 활동을 멈추라'고 촉구하는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침략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촉구했다.
1970년대 세계사 정세,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