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지린성)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 서울시 용산동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백잔은 해로울 잔(殘)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고구려가 백제를 낮춰 부를 때 사용한 표현이다. '□□'은 알 수 없는 두 글자다. 일본 학자들이 제시한 원문과 해석문에 따르면, 왜국이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신하국으로 삼았다는 말이 된다.
지난 100년간 일본 역사교과서는 한 술 더 떴다. 학계 논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원문의 '□□'이 동사가 아니라 '가야'를 지칭하는 명사라고 단정했다. A 앞부분에 백제·신라가 언급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문장은 광개토태왕이 백제·신라를 어떻게 했는가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가야는 이 문장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라' 앞의 '□□'에는 가야라는 명사보다는,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행위를 지칭하는 동사가 오는 게 순리적이다.
하지만 일본 역사교과서는 이를 무시하고 □□에 가야를 넣은 뒤 "신묘년 이후에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가야·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에 관하여, 백승옥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2015년에 <동양학> 제58집에 기고한 '광개토태왕릉비문 신묘년조(條)에 대한 신해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해석은 학계에서의 논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100여 년 동안이나 일본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대(對)한반도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광개토태왕릉비는 오랫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가, 1883년 일본군 장교 사카와 가게노부가 발견하고 일본군 참모본부에 보고했다. 1875년에 강화도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일본이 이 땅에 대한 경제 침략에 열중하고 있을 때, 이 비의 존재가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 군부에 보고됐던 것이다. 일본은 6년간 비석의 존재를 비밀에 부치고 자체 연구에 몰두하다가 1889년부터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 후 신묘년 기사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됐다. 옛날에도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으므로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로 연결됐다. 하필이면 광개토태왕릉비를 한국침략 정당화의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일본 연구 결과 발표 이후 쏟아진 '반론'이에 맞선 반론이 이미 80년 전부터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됐다. 지금도 남북한과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반론이 이어지고 있다. 반론의 핵심은 B 부분의 행위 주체를 왜국이 아닌 광개토태왕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백제·신라가 고구려를 황제국으로 떠받들던 상황에서, 모종의 사정변경으로 인해 태왕이 두 나라를 재차 복속시킬 일이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론에 참여한 학자들은 제각각의 의견을 내놓고 있다. 100인 100색 양상이다. 한·일 양국의 민감한 문제인 동시에, 확실한 정답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혼전 양상이다. 하지만 반론을 대체적으로 분류하면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현재의 비문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인정하는 쪽과, 현재의 비문이 원래의 비문과 다를 거라고 보는 쪽이다.
비문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B의 행위 주체를 광개토태왕으로 해석하는 흐름은, 1938년에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 정인보에 의해 처음 시작됐다. 이 흐름은 오늘날 남북한에서 통설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도 지지하는 학자들이 있다.
쉼표나 마침표 같은 구두점이 표시되지 않은 고대 한문을 번역할 때는, 해석의 편의를 위해 구두점을 찍고 문장을 나눈다. 이때,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일본측 해석 방식과 달리, B를 '(B-1)而倭以辛卯年來'와 '(B-2)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으로 분리하면, '일본이 신묘년부터 건너왔다'와 '광개토태왕이 해로를 통해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일본이 신묘년부터 건너온 일로 인해 태왕이 백제·신라를 재복속시킬 사정이 있었다는 쪽으로 해석된다. 일본이 제시한 비문에 따르면, B-2에 태왕이란 주어가 없지만, 문맥상의 행위주체가 태왕이므로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B-2의 두 번째 글자인 해(海)가 원래는 왕(王)이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렇게 되면 B-2의 행위 주체를 태왕으로 해석해도 무방해진다. 이것은 지금부터 설명하는 반론의 두 번째 흐름에 속한 학설이다.
두 번째 흐름은, 비문이 변조됐다는 전제 하에 B의 행위주체를 태왕으로 보는 것이다. 1972년 재일동포 역사학자 이진희가 처음 제기한 주장이다(비문 변조설). 비석에 석회가 칠해져 있을 뿐 아니라, 형태나 크기 또는 배열이 현저히 다른 글자들이 있다는 점에 근거한 주장이다.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한 김병기 교수도 이 입장을 따르고 있다.
이진희는 1994년 한국에서 발간된 <광개토왕릉비의 탐구>를 통해, 비석을 발견한 사카와 중위가 비문 일부를 변조한 데 이어, 1900년 전후에 일본군 참모본부가 변조 사실을 은폐하고자 석회 칠을 했다고 주장했다.